"여자라고 총 못 들 이유 없잖아요" 5·18 참여한 '1세대 페미니스트'

[5·18 정신적 손해배상㉞] 여성시민군 출신 남민아씨

나주·해남 돌며 활동…"계집이 거길 왜 갔냐" 편견이 더 힘들어

 

"여자는 무섭다고 꺅꺅 소리만 지르고, 방 안에만 숨어 있으라는 법이 있습니까?"

'여장부' 스타일이다. 진한 눈썹에 강인한 눈매, 목소리도 쩌렁쩌렁하다. 전라도 사투리가 살짝 섞였지만 '~요'보다 '다'나 '까'로 끝나는 '다나까' 말투를 자주 사용했다.

22일 광주 북구 문흥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남민아씨(65).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총을 든 '여성 시민군' 출신이다.

그는 "내 고장 광주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며 "여성들도 총을 들고 적에게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말을 할 때면 왼쪽 광대뼈 쪽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80년 5월 남민아씨는 광주 북구 임동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평범한 스물다섯 살 여성이었다.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전까지는 전남 담양 고향 집에서 살았다. 8남매 중 장녀로 막둥이 남동생을 제외한 여섯 명의 여동생들과 부대끼며 지냈다.

막둥이와는 열여덟 살 차이가 났다. 부양해야 할 동생이 많아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했고 월급을 받으면 매달 집으로 보냈다.  

5월17일 토요일이었다. 나주가 고향인 한 직장 동료가 집에 마늘쫑이 자랐다며 같이 뽑아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낮 동안 품앗이를 하고 광주로 넘어왔다. 남구 백운동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길가에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백운동에서 임동까지 걸어가야 했다. 나주에서 품앗이로 받은 마늘쫑을 머리에 이고 한참을 걷다 한 남성을 만났다.

"'뭔 일 있다요?'라고 물었더니 '학생들이 데모해서 시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차가 안 오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뭔 일이 일어나려는 모양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기숙사까지 걸어갔죠."

이튿날인 18일 저녁, 시내에서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각목과 피켓을 든 학생들이 보였다. 동료와 함께 학생들에게 물었다.

교련복을 입은 한 학생이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고 하니 물러가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씨는 동료와 곧바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공중전화부스를 두드리며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같이 외쳤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전라도 여자 아니겄습니까. 한 서너 시간 같이 시위를 하고 10시쯤 기숙사 통금시간에 맞춰서 들어갔죠."

19일과 20일은 일이 바빠 밖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보냈다. 다음날인 21일, 임동 일신방직 앞길을 지나다 수많은 차량 시위행렬을 마주쳤다. 대학생들이 차에 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사흘 전 시내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의 말이 떠올랐다. 남씨는 지나가는 차량의 보닛을 '탕탕' 치며 멈춰 세웠다.

"시위대에 참여해야것다 생각하고 '나도 태워주쇼'라고 했더니 남학생이 '여자는 안 됩니다' 그래. 그래서 '몽둥이 들고 구호 외치는 데 남자 여자 나눕니까? 우리 집은 딸만 일곱인디 나 하나 사라져도 상관없응께 태워주쑈'라고 따졌죠."

남학생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안 된다'며 수차례 손사래를 쳤다. 남씨는 계속해서 "시위대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결국 학생들은 남씨를 차에 태웠다.

남씨는 차를 타고 발산마을 뽕뽕다리를 지나 양동과 유동을 수 바퀴 돌며 "전두환 물러가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김대중도 석방하라", "계엄철폐" 등을 외쳤다.

각목을 들고 차량을 퉁퉁 치며 구호를 외칠 때 남씨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광주시민 총궐기대회 모습.© News1DB


오후 1시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발생한 직후 남씨가 탄 차량은 나주 경찰서로 향했다. 잠겨있는 경찰서 무기고를 차량으로 무너뜨리고 총을 챙겼다. "여자는 안된다"고 했던 학생들은 어느새 남씨를 동료로 생각하며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차를 타고 전남 해남까지 내려가 군민들에게 광주의 실상을 알렸다. 해남군민들은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며 구론산과 박카스, 이불 등을 차에 실어줬다.

"한 아주머니가 '아따 학생이 질로 고생허네, 여학생이 어쩜 이려?' 이럼서 칭찬을 해 줍디다. 당시 학생은 아니었지만 칭찬을 받응께 몸 둘 바를 모르겄더라고. 그 말을 듣고난께 '이 한 몸 불 싸질러서라도 민주화를 이룩해야겄다', 그런 맘이 들더라고요."

해가 서산 중턱에 걸려있을 무렵, 해남에서 광주로 다시 돌아왔다. 광주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들어갈 수 없다고 해 전남 나주 쪽으로 우회했다.

학생들은 졸음을 이겨가며 차량에서 훌라 송을 불렀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그때 어디선가 '두두두두' 소리가 들렸다. 헬기 소리인 것 같았다. 남씨가 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무언가 강하게 그의 얼굴을 강타했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자정 무렵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나주 금성관(옛 나주 군청)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얼굴이 너무 아팠다. 피가 흥건한 게 느껴졌다. 주위에서 학생들이 '아가씨가 죽은 것 같다. 관을 구해와야겠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안 죽었어요, 살았어요, 살려주세요."

기운을 모아 겨우 목소리를 냈다. 한 학생이 그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너무 춥다고 하니 이불을 덮어줬다. 금세 이불이 피로 젖었다. 거울을 보여달라고 했다. 코뼈가 부러진 것인지 코끝이 볼 쪽으로 꺾여있었고 광대뼈가 으스러져 있었다. 앞니도 없었다.

"이래선 안되겄소. 아가씨를 병원으로 옮깁시다."

학생들은 남씨를 차에 태워 나주 영산포에 있는 한 병원으로 옮겼다. 남씨는 그곳에서 9일간 입원했다. 

입원 6일째 되던 날, 남씨는 다른 환자의 아버지에게 쪽지를 전하며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입원 9일째, 어머니와 고모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엄마' 부르며 손을 잡았다. 하지만 '엄마'의 반응에 실망감이 밀려왔다고 했다.

"'엄마'하고 부르며 손을 잡았는데, 어머니가 '이 기집애야, 얼굴이 이게 뭐냐, 너 시집이라도 가겄냐'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엄청나게 실망했죠. 이 와중에 얼굴이랑 시집이 중요합니까."

퇴원 후 조선대병원으로 옮겨 한 달 하고도 10일을 더 입원했다. 치아를 고치고, 입술을 꿰매고, 광대뼈와 코뼈를 맞추는 대수술을 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지만 전 같지 않았다. 두통이 너무 심해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코로 숨 쉬는 것도 불편했다. 의치 때문에 웃는 것도 신경 쓰였다. 왼쪽 눈 밑과 광대뼈가 말을 할 때면 덜덜덜 떨렸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모습.(5.18민주화운동기록관 상영 영상 갈무리)© News1


'전시 상황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였지만 정작 힘든 건 다른 데 있었다. 5·18에 참여했다는 따가운 시선이었다.

"여자가 5·18에 참여했다고 더 손가락질받았죠. 군인들에게 끌려가거나, 성폭행 당한 것도 아닌데 '여자답지 못하다', '왈가닥', '왜 나대냐' 등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무 이유 없이 비판을 받아야 했어요."

결혼할 때 남편에게도 5·18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광주의 한 구청 공무원이었다.

"어마어마하게 고지식한 사람이라 이해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또 5·18 참여한 게 굳이 말해야 할 일입니까? 내 동네, 내 가족 지킬라고 나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끝까지 숨기려고 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남편이 알게 됐다. 1991년, 장애 12급 판정을 받아 국가로부터 5·18 보상금 3500만원을 받았을 무렵이었다.

보상금 신청을 위해 몇 차례 구청을 다녀간 모습을 본 직원들이 남편에게 얘기한 것이다. 얼마 뒤 보상금 관련 서류가 든 우편물이 집에 도착하자 남편은 우편물을 낚아채며 "그런 델 왜 나갔냐"며 화를 냈다.

"지금은 5·18이 자랑스러운 역사로 인정받지만, 그때만 해도 이해를 못 할 때입니다. 보상금 서류를 보고 욕을 하고, 화를 내고… 괘씸했는지 왜 선볼 때 그런 얘길 안 했냐고…."

남씨는 수많은 말들 중 가장 상처받은 게 '여자가 다소곳하니 있지, 왈패도 아니고 뭐 할라고 거길 갔냐'는 말이라고 했다.

"'잘했다' '고생했다'는 칭찬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근데 사람들이 '계집 애가 다소곳하게 있어야지 왜 나대고 다녔냐'고 손가락질하니까… '얌전해야 한다' '현모양처가 돼라'고 하니까 제일 힘들었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오장육부를 뒤집어놔요. 남편은 속도 없이 그걸 시댁에도 얘기해서 시누이가 '데모를 왜 해, 가만히나 있지 언니'라고 말하는데 입 다물고 눈물만 나더라고요."

그렇게 입 다물고 귀 닫고 눈 감고 30여년을 더 살았다. 지금은 남씨도 나이가 들어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자'며 남편에게 '대들기(?)'도 하지만 지난 세월은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1세대 페미니스트'의 설움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과 무관하게 나는 후회 안 합니다. 후회라니요! 내가 80년 그때 죽었다고 해도, 후회 안 했을 겁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때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가 되고 진보했잖습니까."

남씨는 5~6년 전 남편이 퇴직하고 자유시간이 생긴 후에야 5·18 관련 단체에서 여성국장과 홍보국장 등을 맡았다. 

42년 전 그날, 남씨가 다친 상황도 단체 활동을 하며 처음 알았다. 80년 당시 입원환자들을 찾아가 기록하고 평생을 자료를 수집한 정수만 전 5·18민주유족회장을 만나고서다.

"그동안은 왜 다쳤는지를 정확히 몰랐죠. 헬리콥터를 피하려고 차량이 빨리 달리다 전복되면서 다친 줄 알았는데, 정수만 전 회장이 '헬리콥터가 위에서 팽팽 돈께 그게 궁금하다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놓고 내다보다가 나무에 부딪혔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그제야 알았어요, 얼마나 활동을 못 했으면…."

구청 공무원을 하다가 정년 퇴임한 남편 연금이 있어 남씨는 다른 5·18민주유공자들보다는 조금 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다. 낮에는 다섯 살 손주를 보고 자녀들에게도 일부 양육비도 받는다.

남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그마저도 '남편이 모른다'는 전제 하에다.

"5·18 단체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회원들을 많이 봤어요. 겨울에 목욕할 데가 없어서 공중화장실에서 씻고, 집에 쌀도 없는 집도 있습니다. 그분들께 약도 좀 먹이고, 몸도 좀 추슬러 주고 싶어요."

남민아씨가 자신이 종이에 적어둔 글을 낭독하고 있는 모습. 2022.7.23/뉴스1 © 뉴스1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설 때쯤 그가 종이를 하나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혹시나 못 할까 봐. 좀 적어놨는데, 읽어도 될까요?"

떨리는 목소리로 종이에 적은 글을 또박또박 읽었다. 독자들에게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이라며, 꼭 말미에 사진과 함께 남겨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80년 5월은 현재 진행 중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많은 피해자분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저도 그중에 한사람입니다. 광주 5·18 민주화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저희 후대에까지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국민들께서도 마음 깊이 간직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적은 힘이나마 이런 희생이 헛되지 않고 잘 지켜질 수 있도록 모든 역할을 다하겠읍니다. 이상입니다.'

남민아씨가 직접 적은 글 사진. 2022.7.23/뉴스1 


기사제공=뉴스1(시애틀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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