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구금된 아웅산 수치 "저항하라"…대규모 소요사태 우려

또다시 군부에 의해 억류된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이 자국민에 저항을 촉구하고 있다.

미얀마에선 군부의 비상사태 선언으로 모든 국경이 봉쇄된 가운데 수도 네피도와 최대 도시 양곤에선 군인들이 배치돼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1일 밤엔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상에선 군부를 비한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해 향후 소요 사태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페이스북의 데이터에 따르면, 쿠데타에 반대하는 '#SaveMyanmar' 해시 태그를 사용한 사용자는 33만여명에 달했다.

수치 고문은 1일 집권 민주주의민족동맹(NLD)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말고 군부 쿠데타에 대항해 진심으로 항의하는 방법으로 대응해줄 것을 국민들에게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 성명은 윈 하틴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대표가 발표했다.  그는 "이 같은 대국민 요청이 수치 고문의 진정한 발언임을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고 강조했다. NLD는 수치 고문이 쿠데타를 예측해 사전에 성명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8888항쟁 앞장선 '장군의 딸'=1988년 8월 8일, 미얀마에서는 군부에 저항하는 '8888항쟁'이 벌어졌다. 당시 어머니 병문안을 위해 고국에 방문한 수치 고문은 수많은 군중 앞에서 민주화 연설을 했다.

미얀마 군중들은 수치 고문에게서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모습을 연상하며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갈 동력을 얻었다. 이렇게 수치 고문은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등극했다.

군부는 시위대를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양곤에서만 200명이 죽고 전국적으로는 약 3000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실제 희생자는 2만명에 달한다는 증언도 있었다. 항쟁이 실패로 끝난 결과 수치 고문은 이듬해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2007년 사프란 혁명 재현되나=2007년에도 미얀마 전역에서는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다.

표면적인 시위 촉발 계기는 유가 인상이었다. 경유 가격이 하룻밤 새 2배가 뛰었다. 경제 파탄에 직면한 미얀마인들은 50년 가까이 이어진 군부독재 체제에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지자 종교 지도자인 승려들이 중심축으로 나섰다.

 

이때도 수치 고문은 비폭력 민주화 시위를 주장하며 시위대가 군부에 항거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집권 군부는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고,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최소 31명이 사망하고 74명이 실종됐으며, 650명이 감금됐다.

시위 진압 이후에도 미얀마 국민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이어졌다. 국제사회의 제재에 시달리던 군부는 민주화를 위한 로드맵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수치, 더 이상 '만델라' 아냐=하지만 수치 고문이 이번에도 전국민적인 저항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직까지 미얀마 내에서 대규모 물리적 사태는 보고되지 않았다.

수치 고문은 집권 이후인 2017년 '로힝야족 인종청소' 사태로 홍역을 치렀다.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수십만 명에 대한 미얀마군의 잔혹한 탄압을 사실상 방조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지지도 잃었다. CNN은 수치 고문이 '더 이상 아시아의 만델라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멜버른대학의 미얀마 전문가인 타마스 웰스는 CNN 인터뷰에서 "서구는 아웅산 수치 고문에게 매우 냉담해졌다. 1990년대와 2010년대 중반처럼 미국과 유럽이 그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수치 고문은 여전히 미얀마인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현지 선거감시단체 여론조사에선 지난해 미얀마 국민의 79%가 수치 고문을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특히 미얀마 인구 70%를 차지하는 버마족의 지지세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치 고문을 지지하는 미얀마인들은 해외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태국 방콕 주재 미얀마 대사관 앞에선 수치 고문의 초상화를 든 시위대가 군부의 재집권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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