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전진주] 컴퓨터와 벼룩
- 26-05-04
전진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컴퓨터와 벼룩
마우이 해변 도로에서 트리 터널을 지났다. 낯설고 아름다운 열대 나무들이 주랑처럼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서 우리를 환영했다. 검고 우람한 몸통에서 뻗어 나온 우아한 가지와 초록 잎사귀들이 SUV 선루프를 감싸듯 아래로 통과할 때 우리는 오랜 비행에 시달린 피로가 씻겨 나가는 상쾌함과 기쁨을 만끽했다. 흰 뭉게구름이 중턱에 걸린 몰로카이 섬이 수평선 멀리 아스라히 보였다. 망고빛 석양 아래 부드러운 파도가 따스한 모래를 싣고 와 지친 내 발을 쓰다듬었다.
하와이 못지않은 아름다운 풍광이 시애틀에 돌아왔다. 청명한 봄날의 레이니어산은 깊이 침묵하는 흰 눈에 덮여 태고적 신비가 감돌고, 5번 국도를 따라 달리노라면 또다시 생명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 계절의 변화가 별로 없는 하와이보다 시애틀 자연의 소리는 훨씬 크게 들린다. 앙상했던 가지마다 아기 손바닥 같은 새순을 달고 꽃술을 늘어뜨려서 온 산과 언덕이 연두빛 샹들리에를 켠 듯 환하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온 천지가 창조주의 솜씨를 청아하게 선포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아름다운 봄을 만나게 될까? 벚꽃, 목련, 철쭉, 아젤리아, 산딸나무… 사흘이 멀다 하고 새로 터지는 꽃봉오리들이 너무나 예뻐서, 참으로 혼자 보기 아까워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런 욕심은 스노퀄미 폭포를 보고 돌아나올 때도 솟는다. 내가 발길을 돌려 떠나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 따위는 없어져도 된다는 듯 그 아까운 폭포수가 함성을 지르며 뛰어내리는 경주를 하고 있겠지. 나만을 위해 펼쳐지는 장관이 아닐진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아직도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을 폭포가 원망스럽기조차 하다.
아주 오래전 쇼어라인에 살고 있던 때 일이다. 그때는 5번 도로 교통 사정이 지금 같지 않았고 길 막히는 때가 없었다. 교통사고가 나기 전에는. 가까스로 노스게이트 몰 앞에 다다르고 보니 여러 대의 경찰차와 구급차가 처참하게 구겨진 차 주변에 웅기중기 모여 있었다. 마침 바로 그 옆을 지날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씌운 들것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애써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날씨는 퍽이나 화창했다. 몰 주차장은 쇼핑객들의 차로 빈틈이 없었다. 빛나는 해 아래 풍뎅이처럼 반들반들하고 매끈한 차들이 앙증맞은 장난감인 양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새잎을 피운 포플러도 파란 하늘이 즐거운 듯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같은 시각, 같은 도로 위에서 나는 살아서 집으로 갔고 그는 이 별을 떠나 집으로 갔다. 아, 내가 세상 하직할 때도 온천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눈부시게 돌아가겠구나.
그날 나는 삶에는 죽음이 찰싹 붙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슬 같은 인생의 본말을 봤다.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달리던 나에게 영원한 것을 궁금해하게 했다. 무엇보다 내가 왜 생명을 가지고 이 별에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나는 누굴까. 생명은 어디서 오나.
‘하느님은 컴퓨터 같고 우리는 벼룩이다.’ 뇌과학자 짐 와일더 박사의 말이다. 80년대 처음 본 컴퓨터는 부엌 냉장고보다 더 크고 육중했다. 이제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지만 그 힘이 미치는 범위는 지구보다 더 거대해졌다. 그래도 나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인류가 생명 창조권을 소유하기 전에는. 벼룩만 한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모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라고 인정하니 편안해진다. 다만 주어진 생명과 내 안팎의 생명에 감사할 뿐이다. 생명의 축포를 터뜨리는 오월의 신비를 깊이깊이 마음에 새기며 즐거워할 뿐이다. 그리고 매일 하느님께 새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다. 올해 핀 꽃이 작년의 그 꽃이 아니듯.
밤하늘을 우러러본다. 천 광년 전에 떠났다는 북극성 별빛이 보인다. 이 세상의 모든 해변의 모든 모래알을 다 쓸어 모아도 저 하늘의 별들이 훨씬 더 많다지 않는가. 신비로운 세상을 누리니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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