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염미숙] 봄은 봄이 아닐 텐데
- 26-04-19
염미숙(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봄은 봄이 아닐 텐데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가 환하게 웃는다. 꽃그늘 벤치가 사람들을 부른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꽃을 올려다보다가 길 건너편 블록을 깐 좁은 인도로 큰길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인도 한편으로 개나리꽃이 줄지어 피었고, 반대편엔 은행나무 가로수 가지마다 손톱만 한 새싹을 다투어 내밀고 있다.
춘천(春川)은 늘 봄인데도 봄이 오고 있다.
은행나무 높은 가지 위에서 까치 한 쌍이 둥지를 짓는다. 며칠 전까지도 성글었던 보금자리가 지금은 빽빽하게 채워졌다.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기 위해 든든한 보금자리를 만들려고 책임을 다한다.
나무 아래로 책가방을 멘 두 아이가 까치 소리에 발맞추어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안 그래도 정겨웠던 그림이 두 아이의 잡은 손으로 완성된다. 이게 고향이지. 혼잣말을 한다. 이후로 오랫동안 이 그림이 그리울 거라는 예감이 든다.
봄은 이렇게도 찬란한데 나에게 늘 봄인 엄마는 누워만 계신다. 엄마는 딸보다 더 밝은 에너지를 가진 분이었다. 최근 일 년 사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엄마는 식사 때를 제외하곤 거의 주무신다. 겨우 밥 두 숟가락에 국을 드시고, 누울 때마다 말씀하신다. 편안해. 내가 딸이 많아서 복이야.
지난해까지도 엄마는 카톡을 보내고 사진도 올리셨다. 시애틀 뉴스를 먼저 들으시고 나에게 알려주시거나 건강에 좋은 음식 정보도 보내주셨다. 조금씩 태블릿 사용이 어렵다고 하시더니 안부 카톡에 엄마의 답을 받지 못한 지도 여러 달이 됐다. 아예 카톡 연락을 못하게 된 요즘 멀리서 사는 딸은 마음 한편이 쓸쓸하다.
엄마가 원치 않는 일을 딸들이 해야 할 때가 있다. 씻기 귀찮아하시는데 씻겨드려야 할 때, 먹기 싫은 음식을 드릴 때. 가고 싶지 않은 병원에 가야 할 때다. 나 좀 가만히 놔둬. 하실 때. 마음이 아린다. 내가 할게. 단호히 말씀하실 때, 몸과 마음의 불균형에 움찔한다. 다섯을 낳고 키워낸 엄마의 몸이 부서질 듯 연약해진 낯선 모습에, 이것이 현실이라고 자꾸 되뇐다.
엄마는 엄마로서, 또 집안의 어른으로서 사명을 다하셨다. 명절마다 자식, 손자, 증손자들을 반겨 맞으며 살아오셨다. 지금 엄마가 끝까지 챙기는 것은 자식의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다. 직접 요리하실 수는 없어도, 먹었냐, 춥지 않냐, 연방 물으신다.
겨우 걷는 엄마가 한밤 중에 무거운 이불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몸을 덮어주고 조용히 나가신다. 땀이 나도 엄마가 편히 주무시려면 하는 수 없으니, 자는 척 누워 있곤 한다.
언젠가 엄마가 눈웃음지으며 말씀하셨다. 봄꽃이 아무리 예쁘다고 한들, 딸들만 할까. 거부할 수 없는 편견이다. 매일 밤 엄마의 호흡을 확인한다. 엄마가 아직 곁에 계시니, 잠이 달다 하시니 감사하다. 엄마 앞에선 씩씩한 척 살아온 나는 이제 정말 씩씩해져야 한다.
누구라도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 언저리에 엄마가 서 계시다. 이 강을 건너는 일이 너무 버겁지 않기를. 받아들이기 힘겨운 현실에 마음 다치지 않기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곳에서 다시 눈뜨는 새 아침, 그곳에 가득한 빛으로 인해 기쁨이 넘치시기를.
엄마가 안 계신 봄은 봄이 아닐 텐데. 봄도 엄마도 아직 여기 머문다. 한국의 봄은 날로 짧아진다고 했던가. 곧 더위가 몰려오기 전, 나는 여기 봄내에 있다. 아직은 봄, 엄마 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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