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시애틀 목마르다
- 26-04-06
박보라(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시애틀 목마르다
땅이 온통 축축하다. 웬일로 시애틀 겨울 날씨가 연이어 맑음, 맑음, 맑음인가 했더니 이번 주는 내내 비 그림이 줄 서 있다. 이곳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계속 비가 오면 우울하다고 하면서 맑은 날이 이어지면 다시 불안증이 도지는지 사막에 엎어진 사람처럼 비를 찾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어두컴컴한데 물줄기까지 차 앞 유리를 가린다. 운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딸이 함께 가자고 한 곳이 있어서 별수 없이 집을 나섰다. 퇴근길이라 그런지 큰 길이 테트리스 마지막 관문처럼 꽉 들어차 있다. 차마다 조금씩 다른 밝기로 검은 아스팔트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인다. 물기 있는 바닥이 그 빛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서인지 여러 개의 보석이 박힌 듯도 하다.
큰 사거리에 작은 단층 건물이 보이자, 내비가 이곳이라며 설레발을 친다. 좌회전하자마자 우회전하세요. 목적지가 오른쪽에 있습니다. 도착한 곳은 도자기 가게다. 모양만 잡혀 있는 허연 몸뚱이의 오브제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다. 엄만 뭘 만들 거야? 딸의 질문에 결정 장애가 스멀스멀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기다란 목을 한 것은 꽃 몇 송이를 꽂으면 예쁠 것 같고, 납작하고 평편한 것은 앞접시로 써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실용성을 생각해 고른 건 머그잔이다. 얼마 전 설거지를 하다가 깬 컵이 생각나서다.
직원의 설명에 따라 우리는 각자 작품 만들기에 몰입했다. 딸은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어서 게임 캐릭터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며 작은 접시에 거북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해진 것을 따르는 건 성미에 안 맞아. 머그잔을 빙 둘러 내 멋대로의 색이 섞이고 뭐라 정의하기 힘든 모양들이 찍힌다.
세 가지 색만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몇 가지를 더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물감들이 가득한 벽면으로 갔다. 그런데 물감 중 몇 가지에 이런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이 물감들을 사용하려면 직원에게 물어보세요. 번거롭게 직원을 부를 생각은 없어서 좀 더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살펴 보니 작은 그릇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물감을 사용하면 이런 식으로 결과가 나온다고 보여주는 예시였다. 빙열이라고 하는 이 무늬는 유약과 흙의 수축률 차이로 해서 마치 마법처럼 드러나는 결과물이다.
건기의 땅은 저런 얼굴을 가졌다. 어디에서부터 퍼져 나간 건지 모를 문양이 온 땅을 뒤덮는다. 퍼석거리는 지질은 조금만 손대도 작은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이 미묘한 패턴은 어떤 동물의 등가죽으로 만든 핸드백을 떠올리기도 하고, 우리네 어머니들의 손등이나 아버지들의 이마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렇듯 메마른 것들이 가진 속성은 축축하다. 이게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어쩌면 내면의 불안증이 고개를 들어 하늘에 간절히 바란 기도의 응답일지도 모르겠다.
그 작은 그릇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서 있다. 물감을 고르는 것도 잊은 채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졌다. ‘나는 목마르다.(I’m thirsty.)’라고. 딸에게도 말해주니 우리 엄마 또 시작이네, 하는 눈치다. 고작해야 갈라진 무늬를 가진 작은 그릇일 뿐인데 굳이 의미를 담을 필요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누군가는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 작은 그릇이 내 갈라진 내면에 비를 내리게 해 주었으니, 이름은 선물이다.
우리가 만든 작품들은 가마에 구워 완성한 후 다음 주에 찾아갈 수 있단다. 두 시간 만에 바깥으로 나왔다. 후드를 뒤집어쓰려고 했더니 이미 비가 그쳤다. 비 내린 후의 알싸한 공기가 코끝을 매섭게 쏘아붙인다. 그 때문에 갑자기 재채기가 바닥을 향해 쏟아진다. 내 안에서 끄집어낸 숨 하나가 땅속으로 스며든다. 축축하고 낭만적인 물기에 딸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무뚝뚝한 딸도 두 팔을 내밀어 차가운 내 몸을 감싸안는다. 엄마, 춥지? 따뜻한 커피 마시러 갈까? 우린 어쩔 수 없는 시애틀 사람인가 보다. 맑음, 맑음, 맑음보다는 우울한 어둠으로 몸을 둘러싸야 되레 마음이 축축해지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반짝이는 아스팔트 위로 선명한 보석들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다.
*김춘수의 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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