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조현숙] 오월의 이야기
- 26-03-15
조현숙(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오월의 이야기
똑같은 계절이 찾아와 있다. 탐스럽게 피어오르던 빨간 철쭉도 그때와 같다. 나무들의 연한 연두빛 잔치에 눈동자의 동공도 연두로 물들어갔다. 싱그러움에 덩달아 젊어지는 5월은 풀냄새 폴폴 날리는 향을 안고 다시 찾아와 있다.
삼 년 전 이때가 생각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사람. 기억 속에서 잊고 싶었던 사람은 자식을 같이 둔 남편이었다. 15년이란 세월을 남으로 살면서 아이들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가끔씩 내 부모님을 찾아뵙는다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의 장례식 때는 코로나 시대에 한국으로 나가 볼 수 없었던 딸을 대신해 사위 자리를 채워 주었다. 헤어지고 난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고마웠었다.
잔정 있게 살가운 구석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동쪽으로 가자 하면 서쪽으로 나서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는 나도 그랬다고 했을 것이다. 서로는 외로움에 서글픔을 묻히고 원망과 미움을 공존시켰다.
그를 미워할 수 있었던 시간은 차라리 사치였었다.
갑작스레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직계 가족의 방문을 요구한다고 병원 측에서 알려왔다.
코로나 시국에 14일 격리를 하면서라도 한국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에 돌로 잠식된 그의 몸은 길어야 한두 달 남았을까, 아이들에게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 준다니, 끝길에 배웅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어쩌면 그를 위해서가 아닌 남겨진 내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가 맞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발을 묶어 두었다. 하루하루 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기다려 달라는 나의 목소리에 그도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런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먼 길 나설 채비를 하는 모양새였다.
임종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병원은 시청에서 허가를 받으라 하고 시청은 병원에서 허락을 한다면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했다. 팬데믹 초유의 사태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길을 잃은 상태였다.
한 사람만 면회가 허용되었다. 그것도 단 15분, 배웅의 기회를 아들에게 주었다. 간 담도암으로 췌장암과 쌍벽을 이루는 포악한 암에게 몸을 내주고 그는 떠나갔다.
나는 오월의 신부였다. 그리고 오월에 그를 보냈다.
솔나무 가지 끝에 손가락 마디만큼 연두로 키를 늘리는 계절에 꽃가루가 눈처럼 뭉쳐 다니는 화사한 오월.
그는 죽고 나는 살았다. 역설적으로 코로나 시대의 멈춘 시간 덕에 그의 간병도 자처할 수 있었다.
그의 장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 아이들의 간곡한 권유로 건강검진을 받았다. 뜻밖에 내게도 작은 암 하나가 독버섯처럼 몸을 갉아먹으려고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빨리 발견된 건 행운이었다. 나는 그가 내게 선물을 주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시아버지께서는 내가 심성을 곱게 써서 그리된 것이라고 했다.
2000년 6월 미국으로 이민 온 후 그는 먼 산만 바라보았다. 술과 담배에 절여져 떠나온 고국 땅만 바라보았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집안의 모든 공기를 질식시키는 듯했었다.
어린 자식들의 뿌리내리는 일을 내가 맡기로 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해마다 눈처럼 내리는 꽃가루 흩뿌려지는 이때가 되면 울렁증이 가시지 않았었다.
“한국에 서방 와 있다고 너마저도 가방 싸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애들 교육까지 못 했다간 사람 취급 안 할 테니 그리 알아라.”
엄마의 그 말은 정말 뼛속까지 아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작은애까지 대학교를 마쳤을 때는 모든 짐 내려놓은 것처럼 가벼웠었다. 조씨 가문에서 열녀문이라도 하나 내어 달라고 시아버지께 농담도 올렸다.
돌아보니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나 싶어진다. 조금 참아 줄걸 조금 뒤로 물러서 있어 줄걸.
60을 채우지 못하고 간 그였다. 사는 동안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두 아이로부터 받을 복을 내게 몽땅 이양해 주고 그가 떠나갔다.
아빠 일찍 보내고 한쪽 남은 엄마 중하게 생각해 주는 아이들에게 고맙다.
행사가 많은 오월, 우리 가족에겐 기억할 날이 하루 더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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