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그녀의 도서관
- 26-03-09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녀의 도서관
책을 덮자, 모과 향이 났다. <책 읽는 여자>의 여운이 종일 코끝에 매달려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과를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책 읽는 여자>인 그녀에게 서툰 그림으로나마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을 무슨 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의 한 조각이나마 그림으로 옮기는 게 나 같은 애송이에겐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꼭 그리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배경 색이 나올 때까지 몇 차례 덧칠하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맺은 튼실한 열매를 떠올리며 모과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였다. 수채화보다는 거친 붓과 나이프로 그린 유화가 그녀의 삶을 담기에 어울릴 것 같았다. 서둘러 만든 액자에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끼워 넣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이태 전 들꽃에 반해서 주말마다 꽃구경 다니던 그 길과 이어져 있었다. 블루보닛이 파란 바람을 일으키던 길을 지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그녀가 책 읽는 여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미 몇 차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반가움과 함께 조심스러움, 기대와 설렘이 먼저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미당 선생과 박목월 시인의 이야기를 곁들인 문학 예찬이 음식과 함께 나를 살찌웠다.
식사를 마치고 ‘가정 도서실’로 향했다.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한 그녀의 집, 현관문을 열자, 훅 책 냄새가 다가왔다. 서가에 빽빽이 서 있는 책들의 사열을 받으며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벽 한쪽에 걸린 혜원의 미인도가 눈에 들어왔다. 기념 제작된 사십 점의 복사본 중 하나로, 거금을 들여 산 것이라 했다. 어설픈 내 그림을 그녀에게 건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모과 향이 나더라는 말과 함께. 그녀의 근사한 시화 작품 곁에 모과 그림이 놓였다. 아담하고 기품 있는 공간에 모과 향이 수줍게 퍼져갔다.
34년 전, 547권의 책을 데리고 그녀는 태평양을 건넜다. 살림살이는 버려도 책을 버릴 수 없었단다. 미국 최대 육군 기지인 포드 후드가 자리한 킬린 시에는 미군 남편을 따라 이주해 온 여성들이 많다. 그들을 위해 그녀는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가정 도서실’을 열어 누구든 책을 빌려 가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녀의 노력이 지역 사회에 알려지면서 가정 도서실은 그곳 한인들에게 모국의 샘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와 의지가 되었던 가정 도서실은 여느 도서관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고시조에서부터 현대 시에 이르기까지 시와 수필과 소설이 벽을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창작과비평, 이상문학상 작품집 등이 출간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가정 도서실에 소장된 1,400여 권의 책은 그냥 책이 아니라 덜 먹고 덜 입고 덜 자면서 일구어낸 그녀의 절실한 삶이었다.
이민 생활 2년 만에 그녀는 딸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었다. 잔인한 생명줄을 몇 번이나 놔 버리고 싶었지만, 문학의 깊고 단단한 뿌리가 그녀를 붙들어 주었단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노점의 좌판을 지키면서도 그녀는 손에 시집을 붙들고 있었다. 몸서리치도록 차가운 수갑에 두 손이 매이던 순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문학으로 다져진 근력 때문이라 했다. 내가 끼니를 잊을 만큼 그녀의 책에 푹 빠져든 건 그녀의 지난한 여정 속에서 내 삶의 조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도서실이라 부르는 걸 나는 도서관이라고 우겼다. 그녀의 도서관에서 소설과 시집 몇 권을 빌리기로 했다. 책장을 정리하며 책을 다루는 주름진 손길에는 전문 사서의 야무진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모든 걸 정리해야 할 때라며 몇 권을 더 얹어 주는 손이 쓸쓸해 보였지만,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곱게 접어 한사코 내 손에 쥐여주던 손길은 한없이 따듯했다.
작은 샘을 파서 척박한 땅에 꽃을 피우고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키기까지 그녀의 걸음이 닿았던 곳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방의 땅에서 부서지고 짓밟힌 자존심이 당당한 자존감으로 되살아나던 곳, 꺾인 날개와 찢어진 꿈이 별 같은 소망으로 피어오르던 곳은 알 수 있다. 그녀가 온몸으로 이루어낸 도서관, 거기에 최정임 선생님이 계셨다. 팔십이란 숫자가 어울리지 않는 작은 거인, 최정임 도서관장님의 푸른 숨결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깊고 넓은 강이 흐르는 작은 그곳에 있던 미인도가 떠오른다. 선생님의 미소가 그림 속 미인의 미소와 닮았다. 바람이 몹시 찬 날, ‘그녀의 도서관’에서 데워진 마음이 오래오래 식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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