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정동순] 거기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거기


거기에 커피숍이 있다. 새벽 5시에 문을 연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거리도 가깝다. 이른 아침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편하게 몇 시간 앉아 있을 수 있다. 토요일 이른 아침, 좋아하는 창가 자리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늘 비어 있다. 직원들은 수년째 비슷한 시간에 오는 나를 알아본다. 톨 아메리카노? 내가 주문하기도 전에 묻곤 한다. 

내가 이 커피숍에 들르는 이유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주중에 읽지 못했던 책을 읽거나 글 한 편의 초고를 완성하기에 딱 좋다. 커피 향이 있고, 적당한 백색 소음이 있다. 두어 사람은 노트북을 앞에 놓고 화면을 보며 뭔가를 하고 있고, 시니어 두세 명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도 커피숍에 간다. 늘 앉는 창가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는다. 책과 독서대, 노트북을 꺼내 놓고 주문하러 일어서는데, 직원 A가 커피 한 잔을 들고 온다. 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한다. 공짜라는 뜻인가? 잘못 주문받아 커피가 남은 것인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얼결에 커피잔을 받는다. 그는 카운터 앞에 선 손님을 보자 급하게 돌아간다. 웬 커피냐고 물어볼 여지가 없다. 굳이 카운터로 가서 돈을 내겠다고 하거나, 왜냐고 물으면 다른 직원들 보기에 그가 곤란해질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가 나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믿기로 한다. 뜻밖의 환대다.

 테이블에 커피잔을 놓고 의자에 앉는다. 평소처럼 우선 잔의 뚜껑을 연다. 진한 액체 위에 떠 있는 몇 방울의 갈색 거품 위로 김이 살짝 피어오른다. 커피 향이 퍼진다. 잔을 코앞에 두고 숨을 깊이 들이쉰다. 흠향 의식이다. 작은 평화와 기쁨이 폐 속 깊이 스민다. 그러고는 살짝 입김으로 불어 너무 뜨겁지 않게 식힌 후 한 모금을 마신다. 혀를 굴려 커피를 입안에 머금어 본다. 쌉싸름한 맛이 미각 돌기를 일으켜 세운다. 첫 모금을 목으로 넘기면 입안은 금세 약간의 갈증을 느낀다. 커피를 더 들여보내라는 신호이다. 

 넓은 창을 통해 거리의 풍경을 내다본다. 잔가지가 풍성한 겨울나무의 우듬지는 수묵화처럼 평화롭다. 새 한 마리가 고요히 앉아 있다가 훌쩍 어디론가 날아간다. 나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늘 아름답다고 느낀다. 지금처럼 살짝 안개에 잠긴 겨울 아침도 그렇고, 초록이 파릇파릇한 여름이나 단풍이 예쁘게 물드는 가을 풍경도 좋다. 비 내리는 날은 도로의 차들이 빗물을 밀어내며 촤아아 달리는 소리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 전조등을 밝히며 목적지를 향해 길을 가고 있을 것이므로.

커피를 절반쯤 마시면 다시 커피 컵의 뚜껑을 닫는다. 이제부터는 몰입의 시간이다. 공책에 몇 문장이 완성되면, 나의 왼손은 다시 커피잔을 집어 든다. 속은 약간 배고픔 비슷한 긴장이 생긴다.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된다. 생각의 갈피를 더듬고, 펜으로 빠르게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책에 쓴 글감을 노트북에 옮긴다.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타닥거리는 자판기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스피커의 음악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도 하지만 거의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조금씩 커피를 마시며 한 잔이 다 없어질 때까지 글 한 편의 초고를 완성한다. 책을 읽기로 한 날은 보통 두께의 책이면 한 권을 다 읽기도 한다. 

오전 9시가 지나면 손님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나는 10시쯤,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온다. 식구들과 함께 브런치를 먹고 일상을 시작한다. 풀타임 근무로 바쁜데, 토요일 아침, 이 한 번의 외출이 나를 충만하게 한다. 더구나 오늘은 뜻밖에 커피 한 잔을 대접받았으니, 특별한 아침이다. 공짜여서가 아니다. 누군가 미소를 보내며 나를 그들의 일상의 한 풍경으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단골이다 보니 나 또한 그들이 만드는 아침 일상의 한 부분이 된 듯하다. 좋은 관계 맺음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거기에 커피숍이 있고, 나는 작은 일로 행복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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