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숙주의 비명
- 26-01-12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숙주의 비명
“엄마, 이것 버려야겠어요.”
딸아이가 냉장고 안쪽에서 물이 흐르는 비닐봉지를 끄집어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언제 사서 넣어두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숙주 한 봉지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한때는 뽀얗고 통통한 줄기로 아삭한 식감을 뽐내던 녀석들이다. 숙주는 쓰임이 많다. 생채로도, 숙채로도 식감을 돋워 나물은 물론 국에서도 한몫한다. 그런데 사 온 지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나는 그만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형체는 삭아서 알아볼 수 없고 봉지 아래쪽에는 녀석들의 진액이 빠져나가 누런색으로 고여 있다.
식구들 보기에도 민망하지만, 무엇보다 식재료를 허투루 다뤄온 내 무관심이 부끄럽다. 맛난 밥상에 대한 기대도 악취와 함께 버려졌다. 결국, 내가 산 건 쓰레기였다. 치열하게 살아나 마침내 먹거리로 성장했는데 밥상 위에 단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회한을 품은 채 쓰레기로 사라지게 했다.
내가 널 사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누군가의 손에서 네 본연의 몫을 다했을 텐데. 널 좋아하고 칭찬하는 밥상에서 위세를 떨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식구들이 나가고 냉장고 청소를 시작했다. 시큼한 냄새도 씻어낼 겸 새해를 맞는 의식이다. 주부의 자존심도 회복시켜야 한다.
냉장실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들어낸다. 묵혀두었던 것들이 숨 고르기를 하듯 냉장고 속의 풍경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저들의 투덜대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사 와서 우리까지 고생을 시킨담. 요즘 사람들은 아까운 걸 몰라요, 쯧쯧. 빈정대는 소리도 들린다.
냉장고가 음식 창고다. 다 들어내고 나니 큰 다라이 두 개를 채우고도 남는다. 마음을 비우기에 앞서 냉장고부터 비울 일이다. 아깝다며 넣어둔 반찬과 양념, 시들어가는 채소들부터 정리한다. 빈 그릇이 싱크대에 가득하다.
생각해 보니 숙주의 그 시큼한 냄새는 내 무관심한 태도에 대한 항의였던 것 같다. 그토록 자신을 봐달라고 내지르는 비명에 어쩜 그리도 무관심할 수 있느냐는 원망이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건 숙주만이 아니다. 말라가는 화분의 작은 꽃들, 미뤄둔 약속, 그리고 차일피일 뒤로 밀리는 마음들.
냉동실은 한술 더 뜬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선입관에 늘 만원이다. 발만 들여놓으면 된다는 듯 들이찬 먹거리들이 문을 떠밀 때도 있다. 할인의 유혹에 빠져 사서 재여 놓고는 유효기간을 넘기고 나면 쓰레기라는 이름표를 붙여서 퇴출시킨다. 배고픔을 가장한 풍요를 채우고 싶은 내 탐욕이 그것들을 어두운 냉동실에 재여 놓는 것이리라.
식초 물에 헹군 행주로 냉장고의 안쪽 몸체를 닦고 나서 미리 빼낸 선반과 서랍을 세재 섞은 물로 씻는다. 투명해진 유리 선반과 서랍을 보니 내 몸을 씻는 듯 개운하다. 냉장고가 방금 목욕한 아이처럼 보송보송하다. 상큼한 사과식초 향까지 곁들여 움츠려 있던 채소들이 살아날 것 같다. 잔소리꾼 엄마가 와도 자신 있게 문을 열어 보일 텐데.
밖으로 들어냈던 것들을 다시 자리 잡아 앉힌다. 자주 손길이 가는 건 앞쪽에, 그렇지 않은 건 뒤쪽에 놓는다. 이내 헝클어지겠지만. 이때만큼은 아주 조신하고 야무진 주부의 손길이 된다. 모처럼 가벼워진 몸무게에 모터 소리조차 경쾌하다. 냉장고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내 입꼬리가 올라간다.
식재료 하나도 때맞춰 조리해야 제대로 된 음식이 되듯 내게 주어진 하루와 인연들도 애정과 관심으로 때맞춰 살려내야 좋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을까. 올 연말의 냉장고에는 원망 섞인 비명 대신 정성껏 돌본 사랑이 남긴 은은한 향기가 가득 차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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