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수필-이복희] 두 그루 나무 사이에서
- 26-01-05
이복희(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두 그루 나무 사이에서
노년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14년 전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가 된 친정어머니를 모시기 시작했다. 그때 남편에게 언젠가 시어머니도 함께 모시게 되면 두 분이 친구처럼 지내지 않겠냐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동거 속에서 두 달 전, 친정어머니는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당뇨로 정기적인 피검사를 받던 중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림프구 수치가 많이 올라가 있습니다. 만성 림프구 백혈병일 수 있고, 임파선암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어두워지듯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음을 다잡았다. 운동과 산책으로 어머니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으로 우리는 공원으로 나갔다. 초록 잎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아이들이 그네 위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어머니는 철부지 아이처럼 웃었다. 햇살이 반짝이는 잔디 위에 흩어진 작은 꽃잎들,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새들의 그림자까지 모두 살아 있는 듯했다.
평화도 잠시, 공원에 화장실이 있었지만 괜찮다며 집까지 가겠다고 하신 어머니는 결국 참지 못했다. 급히 뛰어가다 잔디밭에 발이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하필 지난해 다쳤던 왼팔을 또 다치고 말았다. 풀잎 사이로 흩어진 어머니의 그림자는 무겁고 쓸쓸했다. 나무도 태풍 한 번에 뿌리째 흔들리듯, 사람의 몸 역시 단 한 번의 넘어짐으로 삶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 무렵, 농담처럼 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알래스카에서 혼자 살던 시어머니가 시애틀로 이주하면서 두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오래 홀로 지내서 몸은 약해졌고, 대소변 실수와 관절염으로 발걸음은 느려졌다. 백내장 수술을 기다리며 앞도 잘 보이지 않아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전에는 외출 후 차에 오르다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었다. 결국 오른쪽 발가락 근처 뼈가 부러졌다.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와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를 괴롭혔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진통제를 찾았다. 치매가 겹쳐 조금 전에 약을 드셨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순간순간의 아픔이 삶 전체를 덮어버린 듯, 말로 이해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의 인내는 바람 앞에 촛불처럼 금세 흔들렸다.
두 분 어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에 가는 날이면 외출 준비 과정은 전쟁과도 같았다. 목욕하는 것을 도와드리고 옷을 입는 동안에도 수차례의 변수가 생긴다. 이제야 나설 만하다 싶으면 한 분은 화장실로 가시고, 다른 한 분은 옷이 불편하다며 다시 계단을 오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손으로 번갈아 어머니의 어깨를 잡는다. 흔들리는 두 그루 나무를 동시에 지탱하는 듯, 버겁지만 놓을 수 없는 책임이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모든 시간을 함께 살아가며 나는 문득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흔히들 마음속으로는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세월은 누구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푸른 잎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누렇게 바래듯 인간의 몸도 언젠가는 쇠락한다. 결국 나도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허탈하고 아프게, 어쩌면 무기력하게. 하지만 그것이 삶의 끝은 아니다. 거센 비바람에도 남아 있는 잔가지에 새순이 돋듯, 늙음 속에서도 또 다른 의미와 아름다움이 자란다.
고요한 아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새들의 노래가 나를 깨우고 차 한잔 속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 언젠가 이 분주하고 고단한 날들도 모두 지나, 기억의 뒤편에서 잔잔한 그림자로 남을 것이다. 그 모든 소란이 지나고 나면, 삶은 뜻밖에도 고요한 얼굴로 나를 돌아볼 것이다. 그때 나는 알게 될 것이다. 소란스러운 하루 속에서도 감사할 이유가 있고 평범한 하루만큼 값진 은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큰 병도 큰 사고도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야말로 삶이 나에게 내주는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이제 병오년의 문이 열렸다. 흔들렸던 지난 을사년을 지나 마음에 맺힌 불안과 돌 하나를 내려놓고, 새해에는 빛이 건네는 미소를 만나고 싶다. 새들은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서 노래할 것이고, 햇살은 여전히 방 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 변함없는 것들 속에서 나 또한 흔들리지 않고 병진년의 일상이 평범한 하루로 채워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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