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수필-노정아] 꽃무늬를 입은 새해

노정아(서북미문인협회 회원)

 

꽃무늬를 입은 새해


오레곤 해변가에는 샌드달러라고 불리는 조개가 있다. 하얀 표면에 꽃잎 모양의 무늬가 명확히 새겨진 조개다. 이 조개가 눈에 들어 온 것은 오래 전 아이 방을 치우다 구석에서 그것을 발견하면서다. 아이들이 바닷가에 다녀오면 으레 가져오는 여러 조개 중 하나려니 생각하며 치워 놓으려 했는데, 예쁜 꽃무늬가 있는 것 아닌가? 신기한 마음에 어디서 가져왔냐고 물었더니 바닷가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갔던 바닷가에 저런 조개가 있었나 싶었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모래를 탐험하며 이것저것을 만지고 만들고 줍느라 분주했지만, 나는 그저 아이들 노는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며 일렁이는 파도만 멍하니 바라보느라 아이들이 뭐를 줍는지도 몰랐나 보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추수감사 연휴를 맞아 바닷가를 다시 찾았다. 아이들은 그새 부쩍 자랐지만 여전히 모래 위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아이들이 많이 커서 이제는 다 컸다 싶다가도, 이렇게 보면 여전히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다. 나는 여전히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머릿속에 가득한 상념들을 파도가 모두 쓸어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아이 손에 들린 샌드달러가 내 눈 앞에 내밀어졌다. “이것 봐”하는 아이의 종알걸림과 함께 샌드달러가 내 손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주춤하는 사이 아이들은 금세 다음 조개를 찾으러 달음질쳤다.

아이들이 떠나고, 조용히 샌드달러와 나만 남은 순간. 왜인지 모르겠으나 조개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샌드달러가 새롭게 보였다. 이리 저리 뒤집어도 보았다. 꽃무늬를 손끝으로 만져도 보았다. 가만히 서서 내 손에 들린 작은 샌드달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어떻게 조개에 꽃 모양이 새겨진 걸까. 너무도 신기한 일이었다. 바닷속 조개에 누가 꽃모양을 새겨 놓았을까.

이리저리 부딪혀 우연히 생긴 무질서한 패턴이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만들어진 듯한 패턴이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조그맣고 기이한 바다의 산물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사실은 나를 둘러 싼 모든 자연이 이와 같다는 것을. 더 큰 놀라움과 경탄이 밀려왔다.

계절이 변하는 줄 알고 옷을 갈아 입는 나뭇잎이라든지, 자신의 모양을 어찌 알고 뾰족하게, 둥글게 자라나는 나무들, 씨앗 하나에서 자기 만의 꽃잎 수를 알고 정확히 그 수만큼 피워내는 꽃들까지.

세상은 알아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얼마나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내 안의 번잡한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물며 이 작은 조개에도 자연의 질서가 담겨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혼자 둥둥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나를 인식하니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미 그 일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번잡스러운 삶이다. 세상은 날로 편리해지지만, 왜인지 마음은 더 편해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조바심과 불안함이 편안한 일상에 문득문득 침투한다. 인간을 위해 발달되는 첨단 기술은, 미안하지만, 삶을 더욱 분주하게 만든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닿을 수 있는 인터넷은, 역설적으로 관계를 가볍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정보와 유행에 아무런 방어막 없이 노출된 채 휩쓸리는 느낌이다. 질서 없는 삶에 압도되고 가끔은 숨이 막힌다.  

그럴 때 이렇게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질서 있게 존재하는 자연을 바라보니 위로가 된다. 매일 같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자연은 묵직한 안정감을 준다.

올해에도 세상은 소란스러울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느라 분주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 시작되는 새해에는 자연을 더 마주하며 세상을 향한 나의 방어막을 세우리라. 매일 마주하는 달과 해, 별과 구름, 차가운 공기와 더운 바람에서, 한여름 시원한 수박의 빨강과 초록의 기막힌 어울림에서, 겨울에 내려 앉는 한송이 눈송이 안에서도 발견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격하며 살리라. 해야 할 일에 압도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일에 너무 조바심 내지 않으며, 세상이 만든 질서보다 자연이 만든 질서를 더욱 존중하며 조금은 느리게 살고 싶다. 

우리 아이들도 계속 모래에 손을 더럽히고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이 식상해지지 않고, 고개만 들면 보이는 초록 나무와 파란 하늘, 노란 달의 아름다움을 매일 감탄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자연을 닮아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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