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조순애] 생애 최고의 용돈

조순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생애 최고의 용돈


생각이 꼬리를 문다. 얼마 전 소천하신  기가 막힌 돈을 앞에 두고 시어머님이 주신 용돈이 돌고 돌아 내 앞에 와 있다. 독립심 강한 시어머님이 당신의 건강이 악화됨을 느끼시고 말년을 큰 아들네서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은 23년 전 일이다.

늙고 병든 몸을 큰 며느리에게 맡기기 미안해하며 당신의 피 같은 돈을 우리 앞에 내놓으셨다. 막 이민 와 살기 막막한 그때, 삼천만 원이란 큰돈은 정말 요긴한 종자돈이 되었다.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매달 용돈을 빼먹지 않고 생을 달리하실 때까지 드리기로 마음먹고 실천했다. 부모를 모시는 건 당연히 장남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친정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와선지 나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다 일터로 가면 온종일 말도 안통하고 운전도 못 하시는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저녁에 그런 심정을 헤아려 조잘조잘 수다를 떨어 드릴 때면 꼭 말끝에 은근히 당신이 주신 돈을 생색내셨다. 돈이란 게 참 요상하다. 받을 때는 황송하더니 받고 나선 내 돈인 양 감사가 빛을 잃어 갔다. 어머님의 생색이 잦아질수록 짜증도 났다. 전보다 나은 환경에 어머님을 모시고 용돈도 넉넉히 드리는데 뭐가 불만이라 저러시나.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 돈으로 딴 짓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마음 밑바닥에서 고부간의 갈등이 싹 트며 불편해지는 순간이다. 

같이 살면서 이러면 다 불행할 것 같아 솔직하게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마땅치 않은 점이 많지만 부족한 딸로 여기시고 친정엄마처럼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함께 해결책을 찾고 할 수 없는 것은 서로 포기하기로 해요 우리.  그 후 드시고 싶은 것, 필요하신 것은 어머님 표현대로 말 떨어지기 무섭게 해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건 사랑보다 의무였음을 깨닫는다. 맛있는 음식도 용돈도 좋았겠지만 다정한 말, 부드러운 손길이 더 필요 했을 텐데….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만 남는다더니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가슴만 먹먹하다. 용돈을 드릴 때마다 너희도 힘들 텐데 하시며 고마워하셨다. 어쩌다 우리의 표정이 어둡게 보였는지 돈 때문에 힘들면 모아놓은 용돈은 갖다 쓰라고 하셨다. 생활비니, 뭐니 다 너희가 알아서 해주니 돈 쓸 일이 전혀 없다고 하셨다. 왜 돈 쓸 일이 없겠는가. 손자 손녀 용돈도 줘야 하고 교회에 헌금도 해야 하고 친구 분들과 점심을 나눌 일도 있을 테고…. 그래도 주머니가 든든해야 힘도 생긴다고 누구나 하는 말대로 용돈을 밀어 드렸다. 가끔은 사업상 급한 일로 어머님의 쌈짓돈을 요긴하게 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자까지 쳐서 후하게 드렸는데 그건 내 머리에서 나온 계산이었지 싶다. 그래서 부모 사랑의 100분의 1도 못 갚으면서 생색은 10배로 내는 게 자식인가 보다.

어머님 말년에는 오랜 세월 앓아온 파킨슨병으로 자리보전하고 누워 지낸 시간이 길었다. 그래도 정신만은 또렷하셔서 며느리 60 생일엔 회갑이라고 특별히 용돈을 주셨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눈으로 가늠되는 봉투 두께로 보아 적은 액수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 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감지하셨는지, 딸 같은 며느리라며 그동안 애 많이 쓴 것에 고맙다며 주신 용돈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평생을 아픈 손가락 같은 막내아들 때문에 눈을 편히 못 감으신다는 것을. 그 돈을 시동생에게 주라고 말씀드리고 앙상하게 야윈 어머님의 손에 봉투를 돌려 드렸다. 그리고 두어 달 뒤 어머님은 고통 없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막내 시동생이 봉투를 하나 내놓았다. 어머님이 이 돈은 꼭 네 형수한테 전해 달라고 하셨단다. 순간 어머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의 온갖 회한이 심하게 내 가슴을 쳤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어머니. 결국 이 돈이 돌고 돌아 내 손에 왔네요. 아무리 잘한다고 애썼어도 부모의 사랑은 그 깊이와 넓이가 자식의 효심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인가. 어머님의 심중엔 못난 막내아들을 부탁한다는 염원이 이 속에 담겨 있으리라. 그 뜻을 헤아려 시동생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려고 온 식구가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독립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막내 시동생을 어떻게 도와야 하나. 끈 떨어진 연 마냥 풀이 죽어 있는 측은한 그를 잘 어르고 달래여 그 나름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 줘야 하는 것이 어머님의 소원이요 내 의무이다.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다 되진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리라. 제게 주신 그 용돈이 어머님의 자식 사랑, 며느리에게 미안함, 큰 짐을 맡기고 떠나야 하는 아픔, 그리고 부족한 며느리를 믿어주는 고마움까지 담긴 물질로 어머님의 깊은 뜻을 깨달게 만드네요.

그거 아세요? 어머니. 어머님이 주신 용돈이 생애 최고인 것은 물질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가 삶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성숙하게 해 주었기에 때문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