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전진주] 명절 쇠기

전진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명절 쇠기


자그마한 카트를 밀고 들어선다. 화사한 꽃다발과 싱싱한 난 화분들이 아름다운 미소를 보내고 구수한 커피 향이 다정하게 인사한다. 몇 걸음 너머에 흘러내릴 듯 쌓여있는 어여쁜 딸기와 블루베리 바스켓 사이로 앙증맞은 눈사람 인형과 산타 촛대도 반가이 맞아 준다.

바야흐로 홀리데이 시즌이다. 장바구니라기보다 리어카 같은 코스트코 카트를 밀며 도떼기시장처럼 들어찬 사람과 물건과 시식 코너와 손수레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명절 상차림에 필요한 육, 해, 공, 식재료와 냅킨과 일회용 컵, 포도주와 탄산 음료 등을 잔뜩 쟁여 담은 터다. 메모해 둔 메뉴를 다시 한번 점검하며 대용량 때문에 빠뜨린 품목을 구하러 두 번째 미국 장에 왔다. 레몬, 파슬리, 버터, 머스터드…또 뭐가 있더라?

명절은 추석과 설에서 땡스기빙과 크리스마스로 바뀌었다. 그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오십여 년 전 시애틀에는 한국 가게가 단 한 군데 노스게이트에 있었다. 거기에는 간장과 마른 미역이 있었다. 그러나 김치거리조차 없어 퓨얼럽 강가에 있는 일본 농장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마늘을 샀었다. 비디오 가게는 물론 한국일보도 없었다. 한인은 미국 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다섯 가정 정도였다.

미국에서 첫 명절, 땡스기빙 때 그 다섯 집이 모여 칠면조구이, 메쉬드 감자, 통조림 옥수수, 껍질 콩구이, 펌킨 파이로 상을 차렸다. 우리는, 이게 한국으로 치면 추석이라며 한복을 꺼내 입고 화이어 플레이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보다 먼저 추석이 왔겠지만, 우리는 음력을 셀 수 없었고, 한국에 연락해 알아볼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곳  대보름 날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여느 날처럼 저마다 허둥지둥 등교하고 일터에 갔다. 송편은 커녕 감, 대추, 밤이 넓은 미국 땅 어디엔가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가을이 와도 청과물 코너에는 언제나처럼 낯설고 퍽퍽한 사과와 서양 배가 바나나와 당근 옆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렇게 추석은 나의 삶에서 사라졌다. 타국살이란 또래와 단절되고 명절도 상실하여 혼자 안개같은 서글픔에 휩싸여 뿌리가 희미해져 가는 일이었다.

그 시절, 설은 구정이 되었고, 신정이 바람직하다고 부추길 때였다. 한국 나이와 미국 나이가 달라서 어느 게 진짜 내 나이인지 헷갈렸다. 마침, 미국도 새해 첫 이틀은 공휴일이어서 우리는 병풍을 두르고 조상님을 위해 새해 기도를 바치고 부모님께 세배를 했다. 떡국은 없어도 동네 그로서리에서 쉽게 갈비를 구했다. 생선은 필레밖에 없으니 품을 내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머리 달린 노란 눈우럭을 구해 지단과 리크로 웃기를 얹었다. 

미국의 성탄절은 유난스러웠다. 어떤 가게는 9월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렸다.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집마다 지붕과 앞마당 정원에 별 장식을 매달고 거실에는 트리를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한 달 내내 법석을 떨었다. 쿠키를 구워 이웃에 돌리고, 선물을 준비하느라 백화점 세일을 돌아다니고, 주말마다 파티에 초대되었다. 

캐럴 콘서트와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 고백성사와 자정 미사와 선물 열기, 대가족 크리스마스 파티를 치르고서야 성탄절 축하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파티는 계속되었다. 이번엔 송구영신이다. 겨우 일주일 남은 시간에 집 안팎 장식을 치우고 올드랭사인을 들으며 새해 카운트 다운 불꽃놀이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그 다음날 아침, 새해를 맞을 때쯤엔 졸린 고양이처럼 나른하기 마련이었다. 1월 1일 도로는 사방이 뻥 뚫렸고 타운 전체가 잠을 자는 진짜 휴일이었다. 

본국의 구정은 설날로 되살아 났지만, 크리스마스에 밀린 뉴이어스 데이는 이제 신정도 구정도 아니다. 손주들 태어나고 어른들 다 돌아가시니 명절은 단출해졌다. 어느 새 노령을 맞은 형제들끼리 식당에서 모이는 걸로 새해 인사를 한다.  일 년에 한 번, 땡스기빙 데이에 온 식구가 우리 집에서 모인다. 음식은 팟럭으로 한 가지씩 가져오기도 한다. 그리고 더는 터키를 굽지 않는다. 그 대신 한중일 대표 음식을 다 모아 놓은 퓨전 잔칫상이다. 갈비구이, 연어 초밥, 깐풍 닭날개, 그릭 샐러드, 치즈 보드, 돼지 보쌈, 단호박구이…변함없이 올라오는 메뉴는 펌킨 파이다. 

아직 한 군데 더 장을 봐야 한다. 코스트코와 미국 장에서 못 구한 무, 배추와 새우젓, 대파를 사러 H마트에 들러야 장보기를 마친다. 아직도 명절 상차릴 힘이 있어 감사하다. ‘엄마, 아빠, 할미이 ~!’ 외치며 들어서는 아이들 모습을 그려보며 가만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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