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무릎 꿇기
그때 우린 곧잘 무릎 꿇기를 했다. 숙제를 안 해오거나 준비물을 안 가져갔을 때, 수업 중에 딴전을
펴거나, 시험 점수가 나쁠 때도 꿇어앉았다. 게다가 단체로
무릎 꿇기는 공공연한 체벌이었다. 거기에 팔 올리기까지 더한 적도 있다. 발 저리고 팔 아프고.
아버지도 무릎 꿇기로 어린 우리
형제를 벌주곤 하셨다. 주로 형제 간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인데 그럴 때면 4형제가 모두 꿇어앉았다. 그럴 때마다 막내는 막내다움으로 아버지를
무장해제 시켰고, 큰 여동생은 닭똥 같은 눈물바람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남동생과 나는 사면되지
못했다.
남동생은 주로 다툼의 원인제공자였고 나는 동생들을 건사하지 못한 맏이의 책임이었다. 다툼은 저들이 하고 벌은 내가 받으니 억울했지만 그렇게 꿇어 앉아있다 보면 처음의 울분과는 달리 아버지의 체벌이
다툼에 한한 것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드라마에서 젊은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을 하는 무릎 꿇기는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저런 청혼을 받는 아가씨는 얼마나 행복할까, 부럽기도 하다. 비슷한 무릎 꿇기가 있다.
왕이 전쟁에 나가는 장수에게 검(劍)을 하사할 때 그것을 받는 무릎 꿇는 자세다. 왕에게는 믿음과 격려의
뜻이요, 장수에게는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바치겠다는 비장한 충성의 맹세다. 청년의 무릎 꿇기 또한 당신을 나보다 더 존중하며 사랑하겠다는 언약 아니겠는가.
갑질 논란을 일으키는 무릎 꿇기도
있다. 상전 앞에 끌려 나간 노비의 형국처럼 가진 자의 횡포에 당하는 힘없는 자의 자세다. 추락된 자존감으로 삶에 대한 의욕을 잃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무릎
꿇기에 항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요즘이다.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왼 무릎을 세우는 무릎
꿇기는 미국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종차별과 경찰폭력에 맞선 항의의사다. 지금 이 무릎 꿇기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 사용혐의로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백인경찰에 의해 목 눌림으로 사망하자 곳곳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고 있다. 서울에서도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중요하다) 시위에 동참하는
무릎 꿇은 사진이 보도됐다. 세계가 한 지붕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시위 끝에 벌어지는 약탈행위로 인근 상점들의 피해가 늘고 한인들에게는 LA 폭동 사건이 되살아날까 조바심을
치고 있는 이곳 속사정이 있고 보면 시위의 본뜻이 크게 반감되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 살면서
구태여 흑인, 백인, 아시아인 등으로 분류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일터 또한 누구에게나 생명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것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아시아인에 대한
무차별 폭력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팬데믹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라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최근에 한국 노인이 버스 안에서 흑인청년에게 구타를 당했다. 앞에서는
인종차별 반대를 부르짖으면서 뒤돌아서는 동양인 노인을 구타한 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폭언 또한 마음 눌림의 언어폭력이라는 걸 진정 모르는 것일까. 자신이 존중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의식이 아쉽다.
문화적 관습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손위 어른들 앞에서는 으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느 날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청년이 있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아이인데 늠름한 청년이 되어 서로 사귀고 싶다고 했다.
속으로 꽤나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나도 어른이 됐구나, 하는 무게와 책임이 절로 느껴졌다. 한 사람의 무릎 꿇기에 대한
책임감도 그러하거늘 민중들의 무릎 꿇기에 대처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감이야 오죽할까.
살다 보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절로 무릎을 꿇을 때가 있다. 지독한 삶의 고통을 덜고 싶을 때, 이루고자
하는 절실한 소망이 있을 때, 내 힘의 한계가 느껴질수록 마음은 가난해지고 무릎은 절로 낮아진다.
어쩜 소망은 이처럼 무릎 꿇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불교에서
하심(下心)을 키우는 절 또한 무릎 꿇기를 통해서다. 거기에 팔꿈치와 이마를 땅에 대는 일은 자신의 신체를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자세다. 마음자리를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는 행동이다. 어느 누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엔 존중받지 않아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생명존중이 인간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BLM 시위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어떠한 변화’는 실은 인간 모두는 어떠한 차별의 대상도 아니라는 공감을 먼저 갖는 일이 아닐까. 무릎
꿇기가 주는 낮은 마음자리만 이해한다면 정녕 올해가 역사에 기록되는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