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일거양득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아직도 ‘자택 머물기’를
한다. 점심을 아내와 함께 먹는다. 벌써 석 달 째다. 어색하더니 익숙해졌다.
느지막이 일어난 날이면 세 끼 먹기 바쁘다. 준비하는 아내나 또박또박 먹는 나, 분주하긴 매일반이다. 점심(點心), 마음에
점을 찍듯 쪼끔만 먹으라는 뜻일까. 하루 한두 끼를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나는 아침, 점심, 저녁 먹는 시간이 즐겁다.
초등학생 때였다. 늦잠 탓에 아침밥을 뜨다 말고 학교로 냅다 달렸다. 지각은 면했다. 서둘다가 도시락도 내팽개치고 왔다. 점심시간은 멀었는데 배가 꼬르륵거렸다. 얍, 옥수수빵! 금방
쾌재를 불렀다. 선생님은 당시 점심을 못 가져오는 학생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 네모난 노란 빵, 옥수수빵을 생각하니
군침이 새어 나왔다.
“데름.”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도련님, 낯익은 목소리였다. 갓
시집온 새색시, 큰 형수였다. 내 도시락이 주인을 찾아왔다. 옥수수빵 기대가 와그르르 무너졌다.
내가 좋아하는 형수였지만, 고마웠을 리가 있나. 놓쳐 버린 빵에 뿔났었을 것 같다. 철없는 막내 시동생이었다. 별다른 주전부리가 없었던 시절의 가물가물한
추억이다.
한국에서 나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 연유로 아내는 20여 년 동안 내 점심을
걱정하지 않았다.
미국에 온 뒤였다. 그녀가 시키지도 않은
내 도시락을 싸겠단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회사 근처에는
중국집과 타이 푸드, 델리, 월남국수, 스시 등 식당이 즐비했다.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마음보다 두루두루
사 먹을 요량이었다.
아내가 내 점심을 싸는 이유는 이렇다. 미국 식당 음식이 대부분 짜고, 달고, 양이 많다. 혈압이
높은 내게 짠 음식은 금물이라나. 나를 챙겨 주는 마음은 가상했지만,
갖가지 식당 메뉴가 눈에 밟혔다. 그런 내 속내를 알아차렸나. 그녀는 아이들한테 하듯, 도시락에 쪽지를 넣는 퍼포먼스까지 했다. 식당 음식은 그림의 떡이 되었다.
미국인 동료들은 대부분 점심을 들고
와 사무실에서 먹는다. 근처 식당에서 주문한 샐러드나 스시, 샌드위치다. 나처럼 참하게 도시락을 싸 오는 친구도 있다. 나 같은 줄만 알고
내가 물었다. ‘와이프가 만들어 준 도시락이구나.’ 그는
언감생심이라며 펄쩍 뛴다. 본인 점심이니 각자 준비한단다. 널찍한
식당 놔두고, 본인들 책상에서 컴퓨터를 노려보며
식사한다. 습관이다.
“시키는 대로 썰어 주세요.”
아내가 점심 준비하잔다. 지난 석 달 동안, 삼시 세끼 꾸리기가 힘겨웠나. 나를 들입다 시켜 먹는다. 토마토,
오이, 아보카도, 케일, 빨간 양파를 같은 크기로 잘게 썰라고 했다.
그녀는 민첩하게 시범을
보였다. 도사(道士) 같다. 나는 써는 데만 한참 걸렸다. 아내는 실란트로라며 미나리 같은 것을
한 소쿠리 내민다. 시키는 대로 잎을 따고, 레몬 한 자루를
착즙했다. 좁쌀과 비슷한 퀴노아를 스팀해 식혀 놓았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단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부리는 품이 도도한
주방장 같다. 퀴노아와 썰어 놓은 것들을 몽땅 섞으라고 했다. 건포도
한 줌이 들어가면 감칠맛 난다면서도 넣지 않았다. 달다는 이유였다. 샐러드
양이 많아졌다. 누가 다 먹을까. 점심 양만 남기고 냉장고에
넣으란다. 레몬즙에 꿀과 올리브 오일을 넣더니 저으라 했다. 나는
남겨 놓은 샐러드에 레몬소스를 듬뿍 뿌렸다.
드디어 퀴노아 샐러드가 탄생했다. 초록빛 넙적한 볼에 샐러드를 담았다. 요리 매거진에 나올 만큼 그럴싸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코로나 사태로 집에 머문
내가 자칫 단조롭게 느낄까 염려되었나. 아내 덕에 나는 요리사가 되었다. 풍부한 단백질 보고인 퀴노아 샐러드, 새콤한 레몬 소스와 환상의
콤비다. 사흘 내리 샐러드를 점심으로 먹었다.
위기는 기회다. 고급스런 퀴노아 샐러드를 만들고 보니 우쭐해진다. 유명한 셰프는
남자가 아니던가. 자택 머물기는 요리를 배울 찬스다. 내
작품으로 아내에게 점수를 따고, 내 입도 호강할 수 있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이다.
아내가 요리 강습을 선뜻 승낙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사료까지 챙긴다.
일주일에 한 번, 12주 수업이다. 열두 가지
근사한 메뉴가 탄생할 예정이다. 아하! 퀴노아 샐러드는 나의 1호 메뉴다. 제2호 요리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