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
-2014년을 보내며-
우리나라의
경우 130년 전까지만 해도 서당(書堂)에 가서 한문 천자문을 외우는 것이 배움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배움의 넓이나 깊이가 너무도 다양해져 물리ㆍ화학 등 자연과학에 해당하는 형이하학(形而下學)은 물론 형체가 없는 법ㆍ경제ㆍ심리ㆍ철학 등 정신과학에 해당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에 관한 학문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산이 요동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과거나 현재나 똑같이 변치 않는 요지부동의 문제가 하나 있다. ‘사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궁극적 문제에 대한 질문이다.
이
물음은 너무 거창해서 결국 죽음을 떠나서는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산다는 것과 죽음’은 함수관계로
평행 선상에 서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직선상에서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하다’는 생각이 미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한 번은 꼭 죽어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그
죽음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없이 당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짓궂은 운명인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정말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한
순간에 태어나서 그 죽음의 한 순간까지 추구했던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기에 죽음이라면 오싹 소름이 돋는다.
소름을
돋게 하고 공포를 불러오게 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원수이다.
1941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포ㆍ양심ㆍ신앙 그리고 빈곤(貧困)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면 이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치료제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톨스토이는
“종교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까지 갈파했다. 결국 종교만이 이 문제를 푸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다 기한이 있어 우리가 시한부로 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러기에 이 시한부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성경의 주제다.
종교는
크게 자력(自力) 종교와 타력(他力) 종교로 분류된다. 자력
종교는 금욕과 수양생활을 통해 깨달음을 불러오게 하고 타력 종교는 우리가 약할 때 곧 강하게 해주는 제3자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의지하게 하는 형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고,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이라고 했다(시편 46:1).
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빛의 힘이요 다른 하나는 어두움의 힘이다. 이 두 세력은
항상 공존하기에 이 세력의 지배하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둘로 나뉠 수 밖에 없다.
하나는 하등동물에서
기원해 수십억 년의 진화과정을 거쳐 생겨난 존재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생각과
가치관은 자유지만 크리스천들은 후자를 믿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사람의 재료를 흙과 생기라 했다. 히브리어로 흙을 ‘아파르(Apyhar)’라고 하고 생기를 ‘니쉬마트
하임(Nishmat Chayyim)’라 하는데 흙의 원소로부터 사람의 모든 기관을 형성한 다음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했다(창세기 2:7). 이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곧 죽음이다.
결국
죽음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는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아니면 산다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음과 직면해 죽음에 대한 바른 자세를 끊임없이 가다듬어야만
한다.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죽음이 평가된다는 이치이다. 그러기에 ‘아름다운 죽음’은
반드시 ‘아름다운 생활’의 뒤를 따라 오는 것이고 ‘의미 있는 죽음’은 반드시 ‘의미
있는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졌던 2014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세모의 계절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고 했으니 올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 을미년(乙未年)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놓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