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Dead
End와 Living End
-부활주일에
즈음해 -
‘막다른 골목’을 뜻하는 영어 표지판에는 ‘Dead End’, ‘No Outlet’ 그리고 ‘No Traffic
Through’ 등이 있다.
이 3가지 낱말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표지판이 ‘Dead End’이다. ‘죽어있는
끝’이란 뜻이다. 이 골목은 트여 있지 않고 막혀있어 빠져나갈
수가 없기에 ‘Dead’란 형용사를 붙여 ‘죽어있는 골목’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인생도 이와 똑같다. ‘생로병사(生老病死)’란 말과 ‘생자필사(生者必死)’란
말 그대로 우리 일생의 끝은 항상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이 막을 제거하지 못하면 바로 ‘Dead End’이고 이 막을 제거하면 ‘살아있는 끝(Living End)’이 된다.
성경을 생명의 책이라 하여 거룩한 책이라 하는데 한문으로 ‘거룩 성(聖)’자와 ‘책 경(經)’자가
혼합된 말이다. 원어의 뜻으로는 ‘하기오스그라페(ἅγιος γραφη)’라 하는데 ‘구별된 책’이란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
구별이란 ‘죽은 끝’을 ‘살아있는
끝’으로 바꿔 놓았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함이로라’(요한복음 12:46)고 했다.
빛은 ‘포스(φως)’라 하여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스코토스(σκοτος)’라 하여 ‘죽음’을 뜻한다. 바로 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이 우리 일생이기에, 이
어둠에서 불려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베드로전서 2:9).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둠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게 된 것이나,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된 것, 그리고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게 된 것도 하나님이 바로 나의 빛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둠에 대해 110회, 빛에 대해서는 163회나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빛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부활은 성서 복음의 심지이다. 불을 켜는 촛대에 심지가 없다면 그 촛대로는 불을 밝힐
수가 없다. 우리는 죄의 고삐를 얽어 매는 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단히 묶여 있으므로 바로
이 쇠사슬에서 풀어 주려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며 따라서 성경이 다른 책과 구별된 책임을 말해준다.
바다가
작은 섬들을 포위하고 있듯이 항상 죽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죽음과 나와의 사이는 한 걸음 정도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종교의 근원도 따져보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있다.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이 두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과연 어는 쪽일까.
베드로전서 2:11에 보면 우리를 나그네와 행인 같다고 했는데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Dead End’인지 아니면 ‘Living End’의 길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았으면 한다. 짐승은 고향을 모르고 사람은 못 잊는
것이 고향인데, 이 고향은 바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더 나은 본향을 말한다(히브리서 11:16).
‘사람들은 죽지만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Men may die, Man never die)’라는
명언이 생겨난 것도 이미 우리 생명을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시편 56:13). 진정 예수께서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순교자의 종교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생명의 종교는
될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부활을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ἀναστασις)’라 하는데 ‘일으키다’란 뜻을 지난 동사 ‘아니스태미(ἀνιστημι)’에서 왔다. 영어로 ‘Raise’나 ‘Stand’와도
같은 뜻이다. 부활의 계절에 즈음하여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를 본받는
복된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고린도전서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