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근 목사(시애틀 빌립보장로교회 담임)
분노와 인생 여정
시애틀 한인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던 변호사 A씨가 과거 자신의 사무실 앞 주차장에서 수발의
총을 맞고 중퇴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었다.
다행히 범인은 현장에서 도망가던 자동차 번호판을 본 이웃의
신고로 쉽게 잡혔다고 한다. 같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빌 조이스(50)로
알려진 범인은 A씨가 맡은 케이스의 상대 변호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인이 의뢰한 사건을 이 두 사람이 함께 맡아 법정 공방을 벌이던 중 이 같은 끔찍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범인은 검사로 10년 이상 근무한 경험이 있고 다시 변호사로 개업한
사람으로 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권총을 들고 백주 대로에서 사람을
죽이려 했다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범인은 500만
달러의 보석금이 책정된 상태에서 현재도 수감돼 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변호사인 그가 그곳까지 찾아가 권총으로 A씨를 살해하려 했다면
그는 그만큼 분노를 느꼈던 것이고 또한 그 같은 분노를 참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남을 죽이고 자기만 잘 살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분노가 결국은 이렇게도
무모한 어리석음을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천하를 다 휘어잡는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6:32)라고 했다.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스승을 두지 않고 사는 막가는 시대다. 13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가 인터넷을
통해 사람을 협박하는 방법을 배우고 여자를 어떻게 겁탈하는지를 배워 그것을 길에 나가 그대로 재현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시대가 됐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지극히 말초적인 감각만을 지니고 살아가는 하등 동물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이 말세의 현실인 것이다.
그 대표적 모습이 바로 ‘분노’다. 자신의 가슴 깊은 데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것이다.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삶의 모습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기에 그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미련한 자라고 단정하신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언12:16)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을 새롭게 상상해 보게 된다. 엄청난 능력을 다 지니고 계시면서도
힘없는 인생들의 잔인한 손에 잡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모진 수모를 다 겪으신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를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향해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그 모진 고통을 다 참아내시던 그 모습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주님을 스승으로 가슴에 모셔야 하는 것이다.
스승이 없으니 오로지 분노와 폭력만이 난무하는 시대가 됐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노라면 미운
사람도 있고 맘에 안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다 수양되지 못한 감정으로만 대한다면 이 세상에
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인내하지 못한 채 남에게 생채기만
내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엄청 불쌍하게 여겨질 것이다.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결핍된 불쌍한 인생들이
바로 그렇게 분노와 혈기에 사무쳐 인생을 마구잡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바라보고 따라 갈 푯대가 필요한 것이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를 잘 알고 있다. 그는 1373년 독일 켈른 부근에서 태어나 젊을 때 은혜를 받고 화란의 케반타에서 공동생활 형제단에 가입하여 어거스틴과
같이 수도사가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순종을 십자가를 통해 배우고 33살에는 신부가 되어 일생을 고난의 길을 걸어간 인물이다. 그가
쓴 제2의 성경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은 그 같은 그의 삶의 경험서이다. 거기에서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그의 천국을 탐하는 자들은 많지만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이다.
삶의 스승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을 이 한 말로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스승으로 가슴에
모시고 그분의 온유하심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5)라고
말이다.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