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어찌 우리 이 날을
-6ㆍ25 사변(事變) 67주년에 즈음해 –
6ㆍ25의 호칭이 ‘한국
전쟁’, ‘6ㆍ25 전쟁’, ‘6ㆍ25 동난’, 그리고 ‘6ㆍ25 사변’등
갖가지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6ㆍ25 사변’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1931년 일어났던 일본의 만주 침략을‘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부르는데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중국을 공격했다. 이것을
공식적으로는 ‘중일전쟁’이라고 부른다.
6ㆍ25도 중국의 ‘지나사변’과 같이 사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총성으로 시작된 전쟁이라 ‘사변’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하지만 이 전쟁은 치밀한 준비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김일성이 1949년 3월과 그 이듬해인1950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 방문 등을 통해 전쟁 준비를 했으며 공산화된 중국과도
긴밀히 협조해가며 1950년 모택동과도 비밀 회담을 했다.
6ㆍ25 사변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사전 협의하고 드디어 1950년 3월 스탈린의 최종 승인과 5월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북한은 전쟁을
개시할 결정적 시각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38선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했다. 전쟁 개시 두 달 여 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했다.
6ㆍ25 사변 과정은 몇 단계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성공 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 9월15일에서 11월초까지의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이다.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이다.
다행스럽게도 북한의 6ㆍ25 사변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육ㆍ해ㆍ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했다.
7월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6ㆍ25사변에 개입했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됐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 인민군은 큰 타격을 받아 압록강 근처까지 후퇴하게 됐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 중부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 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Malik)는 전쟁 당사국에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Ridgway)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됐다.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이 마침내 중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나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조인하기까지의 요약이다.
6ㆍ25 사변은 올해가 67주년이 되는 해로 승자도 패자도 없이 깊은 상처만을 남기고 실종자와 행방불명자를 빼고도 군인 전사자만 남한 14만9,000명, 북한 29만4,000명에 달할 정도로 지울 수 없는 ‘어찌 우리 이 날’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