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 19일 (금) 로그인 PC버전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2021년 1월 시애틀N 사이트를 개편하였습니다. 열람하고 있는 사이트에서 2021년 이전 자료들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눈산조망대/ 근엄한 영정

시애틀N 조회 : 4,828

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근엄한 영정

 
한국 ‘국민배우’ 신성일의 부음기사를 읽으며 눈이 영정(影幀)에 오래 머물렀다.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터이다. 백발에 흰 셔츠 차림의 초상화 같은 그 영정은 신성일이 아닌 영감탱이 강신영(신성일의 본명)이었다. 대다수 국민들 가슴엔 ‘맨발의 청춘’에 나온 패기발랄했던 신성일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왜 그 사진을 영정으로 쓰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미국인들의 신문부고 영정은 대부분 노인 모습이 아니다. 고인이 생시에 가장 뿌듯하게 여겼을 듯한 모습이 많다. 신부사진도, 군대시절 모습도 있다. 사진으로는 본인여부를 알아보기 어렵다. 정작 본인은 관에 누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조객들에게 보여준다. 한국은 장례문화가 전혀 달라 노후 모습이 아닌 영정은 금기처럼 돼있다. 물론 ‘뷰잉’ 절차도 없다.

서울엔 영정전문 사진관이 있다지만 한인사회에선 교회나 노인회가 날을 잡아 단체로 노인들의 영정을 찍어줬다. 요즘은 자녀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어주기도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은 옷으로 치장하고 비싼 돈 들여 모처럼 미장원에서 광내고 영정사진을 찍지만 표정들은 한결같이 근엄하다. 하긴 ‘미아이 사진’(결혼중매 사진)도 근엄하긴 마찬가지였다.

영정준비가 서러워 표정이 굳어지는 한국 노인들과 달리 자기가 죽은 뒤 들어가 누울 관을 스스로 신바람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뉴질랜드의 ‘관 클럽’ 회원들이다. 평균연령이 70대 중반으로 내 또래인 이들은 매주 화요일 동네의 한 빈 건물에 모여 뚝딱거리며 관을 만든다. 본인들 말로는 자기들이 사후에 사용할 ‘품질 좋고 값 싼 지하용 가구’이다.

재료(합판) 값이 개당 170달러에 불과해 비슷한 품질의 상업용 관보다 엄청나게 싸게 먹힌다. 아마추어 목수지만 개성대로 디자인해 작품이 독창적이다. 완성된 관을 집에 가져가 본래 목적의 지하용 가구가 되기 전까지 지상용 가구로 사용한다. 대개 담요, 쿠션 따위로 덮어놓고 옷장으로 쓴다. 돈 안 들고 생산적인 취미활동이라지만 아무래도 께름칙하다.

한인들 중에도 자기 장례식을 준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관을 만드는 게 아니라 관이 들어갈 묘지를 미리 구입한다. 내 친구 하나는 오래 전 가톨릭 묘지공원에 부부가 묻힐 땅을 샀는데, 공교롭게도 그 공원이 내 아파트 바로 옆에 있다. 아파트 둘레 길을 산책하다가 묘지 후문이 열려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조용하고 널찍한, 최상의 산책 코스이다.

안 그래도 많은 묘지공원들이 산책로나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한국의 동작동 국립묘지(서울 현충원)와 버지니아의 알링턴 국립묘지가 그렇고, LA(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 기념공원도, 쿵푸스타 브루스 리가 묻힌 시애틀의 레이크 뷰 묘지공원도 그렇다. 이런 곳에선 죽음 문제로 심각해지지 않는다. 내 친구의 유택이 될 묘지공원도 내겐 그냥 산책로일 뿐이다.

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2년전 겨울 아침 한 장로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날처럼 비오는 날에도 나와 함께 배낭을 메고 산 정상에 올랐던 장로님이 관에 누워있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았다. 나보다 불과 10수년 위이다. 관속에 누운 그분의 얼굴이 내 얼굴과 오버랩 돼 어지러웠다. 그래서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더 많이 참석하라고 현자들이 권면하는 모양이다.

내가 10여년 뒤 관속에 누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충격적이었지만 장례식 준비를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으니 변호사를 찾아가 유언장을 만들 필요가 없다. 시신을 화장할 예정이므로 없는 돈에 묘지를 구입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더 잘 먹고 더 많이 산에 오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장례준비는 안 돼 있지만 나도 영정은 준비해 놨다. 작년 여름 시애틀산악회 회원들과 레이니어 마운틴으로 단체캠핑을 갔을 때 동료가 찍어준 사진이다. 눈 덮인 레이니어를 배경으로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린 채 티 없이 웃고 있는 모습이다. 관 속에 누운 나보다 훨씬 나답게 보일 터이므로 그 사진을 보는 조객들도 심각하지 않고 나처럼 웃을 것 같다.

눈산조망대 목록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 



윤여춘 고문 "눈산 조망대"

분류
Total 330
List
 1  2  3  >  >>

© HHB Media LL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