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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의 시선] ‘한순간 훅 간다’ vs ‘찍히면 훅 간다’



이유식 뉴스1 주필

이달 초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 벽면(백보드)에 ‘정신 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는 문구가 게시돼 화제가 됐다. 집권당 대표실에 걸린 문구치고는 천박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주변에서 일순간 판단과 처신을 잘못해 수십년 쌓아온 경력과 공적을 송두리째 잃는 사람을 종종 봐왔기에 신중한 처세를 강조하는 데 이 메시지만큼 간결하고 명료한 아포리즘을 찾기도 쉽지 않다.

말이 씨가 됐을까. 요즘 여야 각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20대 총선 공천과정을 보면 이 말이 정말 실감나게 다가온다. 박근혜 대통령의 분신을 자처하며 친박의 전위에 섰던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막말 논란으로 공천에서 컷오프된 것은 대표적 사례다. 김무성 대표가 언급했다는 ‘낙천 살생부’ 논란이 당안팎을 뒤집었던 시점에 터져나온 취중 녹취록(“김무성이 죽여버리게. 죽여버려 이XX. 다 죽여. 그래서 전화했어”) 파문 한방으로 그렇게 잘 나가던 윤 의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박 진영으로선 이런 정도에서 사태를 수습한 것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녹취의 불법성 시비를 국면호도 카드로 사용하려다 되레 막말 대화 상대방이 드러나고 공천배후설 의혹 등으로 사태가 번졌으면 어떤 후폭풍을 낳을지 예상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품위’ 잣대로 친박 핵심, 청와대 복심을 ‘훅’ 보냈으니, 이는 말 그대로 읍참마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상현 컷오프라는 대세점(大勢點)을 잡아 공천의 엄중함을 과시하고 ‘당 정체성’이라는 잣대로 유승민 세력을 쳐낼 명분까지 얻었으니 말이다.(윤 의원을 ‘무소속 공천’이란 묘수 혹은 꼼수로 구제한다는 얘기는 논외로 하자) 

이후 공천관리위원회를 장악한 이한구의 칼질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풍림화산(風林火山)’을 연상케 한다. 이종훈 권은희 류성걸 조해진 김희국 등 유승민계 의원을 솎아내는 손길이 ‘바람처럼 빠르고 숲처럼 조용하며 불길처럼 맹렬하고 산처럼 묵직하다.’ 

“의석 몇 개보다 정체성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당 정체성이 뭔지, 누가 왜 어떤 근거로 이런 판단을 했는지, 그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하고 헤쳐나갈 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그런 논의가 있었던 흔적도 없다. 이참에 이재오· 진영 등 눈엣가시 같고 구원(舊怨)이 있던 비박계 대표주자까지 ‘훅’ 날렸으니 이한구를 앞세운 공천 기획자의 의도는 120% 달성된 셈이다. 

공천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찾아봤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일’이란다. 근데 한자로는 ‘公薦’이고 영어로는 ‘public recommendation’이다. 정치결사체인 정당이 하는 일이지만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투명해야 하고, 공천이든 낙천이든 납득할 수 있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서청원 최고위원이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새누리당은 이날 '정신차려라 한방에 훅 간다'라는 메시지를 비롯해 당 페이스북을 통해 공모한 작품 중 가장 직설적인 쓴소리들을 엄선해 회의실 백보드를 채웠다. 2016.2.29/뉴스1 © News1 오대일 기자

이런 맥락에서 김무성의 살생부 발언, 새누리 공천 여론조사 지라시 유출, 윤상현의 막말 녹취록, 김무성의 모호한 처신, 이한구의 모순적 언행, 유승민계 및 비박 의원 집단 컷오프, 유승민 잠적 및 칩거로 이어진 그간의 상황은 공당 공천관리위의 정체성은 물론,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특히 이한구 공관위의 행적과 면면이 불투명하다보니 항간의 시선은 공관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찾는 데 열심이다. 졸지에 컷오프된 친이계 대부 이재오 의원 지지자들이 이한구 공관위를 겨냥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상향식 공천은 온데간데 없고 망나니의 칼춤만 가득하다”고 독설도 서슴지 않는 실정이다.

‘30시간 법칙’으로 유명한 김무성 대표의 뒷북 처신도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동안 상향식 공천이 정치개혁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며 정치생명도 걸겠다고 했던 그는 이한구 위원장의 노골적인 탈선에 전혀 제동을 걸지 못했다. 이른바 전략공천(하향식)이 전체 지역구 253곳 중 108군데에 달해 그의 말만 믿고 일찍부터 표밭갈이를 하다 헛물을 켠 사람들은 그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그가 왕관만 쓸 욕심만 부렸지, 그 무게를 감당할 내공은 키우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최근 일주일 동안 우리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보며 마음 졸였고 놀랐고 실망했고 흥분했다.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의 기회와 위험을 따지면서, 현재진행형인 4차 산업혁명의 결과 인간은 기계와 겨룰 존재가 될지, 기계를 다룰 존재가 될지에 대한 철학적 공학적 윤리적 고민을 서둘러야 한다는 메시지도 받았다. 개인은 물론 국가운영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가 임박했다는 것, 그래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번영할 것인지, 그 흐름을 놓쳐 패망할 것인지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이 세기적 의미를 함축한 전환기적 시기에 새누리당은 정치인력을 충원·교체하는 작업을 벌이며 친박의 이해만 대변하는 퇴행적인 사천(私薦)으로 일관, 품위와 정체성을 모두 허물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을 요청했지만 이한구 공천위는 무엇에 쫓기듯 헌칼을 마구 휘둘렀다. ‘한번에 훅 가는’ 것이 아니라 ‘찍히면 훅 가는’ 구태정치가 되살아났다.

그 결과 정치는 다시 한번 조롱거리가 됐고 정치허무주의, 정치무용론 등의 냉소가 확산되고 있다. 정치는 명분이고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다. 유승민 문제에 집착해 서로 “먼저 결단하라”고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고, ‘비박 무소속연대’ 출현 가능성이 점쳐지며, 낙천자들의 발걸음과 몸값이 어지러운 작금의 새누리 상황은 정치혐오를 부추길 뿐이다. 

공적 헌신을 약속하고 주요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정신차려라. 한순간 훅 간다’는 경구는 늘상 자신을 긴장시키고 신중한 처신과 언행을 습관화하는 자계(自戒)의 문구로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이것이 ‘눈치껏 해라. 찍히면 훅 간다’는 것으로 변질되면 권력의 먹이사슬만 판치고 정치는 이념도 결기도 없는 너절한 군상들의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 ‘훅 보내는’ 위치에 있었다 해도 내일 ‘훅 가는’ 신세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하는 곳에서 어떤 꽃이 피겠는가.  

그래서 친박이든 비박이든 유승민계든 다시 들려주고 싶다. “정신차려라. 한순간 훅 간다”

사족 하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생가에 가면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정약용 선생의 당호를 만나게 된다. 이 당호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담고있다고 한다. ‘한순간 훅 간다’에 다름 아니다. 이런 경구를 옆에 두고 살얼음 건너듯 살았던 다산도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 사후 남인내 시파-벽파의 당쟁에 휘말려 18년동안 유배지를 맴돌았다. 매사 여유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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