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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수필-이한칠] 첫 작품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첫 작품
 
 
손님이 시애틀에 온다고 하면, 마음이 분주해진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우리 집에 온다고 한다. 그가 머무는 기간에 맞춰 관광 계획을 짜고, 회사에 휴가를 낸다. 손님방을 정리하고 집 안팎을 청소한다. 아내는 날짜별 음식 메뉴를 짜느라 골몰하고, 나는 좋아하는 와인들을 채워 놓는다. 여기까지는 으레 하는 일이다.

늘 마음에 담아 두어 왔던 친구이기에 이번엔 무언가 특별한 일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한국에 살 때, 친구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사온 귀한 양주를 함께 마시던 기억이 났다

순간 언젠가 꼭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떠올랐다. 막걸리였다. 친구를 만나, 내가 처음 빚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나눌 생각을 하니 가는 시간이 더디기만 했다. 친구를 기다리며, 막걸리가 익기를 고대하다 보니 마음이 설렌다.

누룩, , 항아리 등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데 어찌나 신이 나던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심정은 어른이나 아이가 꼭 같나 보다. 인터넷 등을 통해 막걸리 만드는 과정을 요약하여 지침서를 만들었다. 각 재료의 양을 정확히 배합했다. 발효에 적합한 온도를 맞추려고 담요로 술 항아리를 둘러싸 주었다.

뽀글뽀글, 거품이 쌩하고 올라온다. 금세 톡하고 방울이 터진다. 새큼하고도 구수한 내음이 사방으로 퍼진다. 내 눈과 귀, 그리고 코까지 한꺼번에 즐거워진다

얼마 뒤에는 내 입은 물론, 온몸과 마음마저 행복하게 해줄 친구, 막걸리가 잘 익어가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설 명절이 되면 구들목은 노상 술독 차지였다. 어머니는 큰 가마솥에 시루를 얹고 고두밥을 쪄서 어린 내 주먹보다 더 크게 밥을 뭉쳐 주셨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도 찜 솥에서 고두밥을 쪄내어 쪼끄맣게 몽쳐 먹어본다. 어머니가 내게 주셨던 것보다 밥 뭉치만 작아졌을 뿐, 어릴 적에 먹었던 그 맛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매일 출근하기 전, 쌀이 곰삭아가는 항아리에 문안 인사하듯 정성을 들였다. 볼록볼록 귀여운 거품이 사각팔방에서 터지면서 서로 섞이는 모양새가 신통하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와 참 다르다고 느꼈다.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우리가 아니던가. 고들고들한 밥알들을 삭혀 막걸리가 되게 하는 누룩, 나는 과연 누룩과 같은 역할을 얼마나 하고 살아 왔을까. 온몸으로 일치를 이루어내는 누룩에게서 너그러움을 본다.

시애틀의 경치에 취해서, 구수한 막걸리에 취해서, 정겨운 사람에 취해서’,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가 쓴 시애틀 여행기의 첫 문장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로 어우러진 시애틀은 훨씬 아름다웠으며, 나의 첫 막걸리 작품도 훌륭했단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와인, 양주 등 다른 술을 마다하고 막걸리만 즐겼던 것을 보면 그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함께 한 시간이 즐거웠고, 편안한 여행이 되었다니 흐뭇했다

아름다운 시애틀에 사는 덕분에 여름철에는 손님을 자주 맞이한다. 오는 날의 공항 마중을 시작으로 떠나는 날의 공항 배웅까지 온 마음을 다하여 대접해야 하는 손님맞이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으면서도 혹시 머무는 동안 불편하진 않았는지 염려되기도 한다.

때로는 헤어지는 아쉬움을 티를 내듯 고단한 몸살을 앓기도 하지만, 기다려서 만나고 헤어짐은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거리가 된다.

절친한 친구들과 나는 사는 집을 서로의 별장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은 나에게 한국에 자네의 별장을 잘 꾸며 놓았으니 언제든지 다녀가라.’ 한다. 서로 언제 오갈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대화만으로도 마냥 흡족하다. 이런 우정은 자칫 삭막할 수 있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다.

진정으로 서로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무엇이든지 기다리며 준비하는 만큼 뿌듯한 느낌이 들지 싶다. 술을 빚어 구수하게 익어가기를 기다리고, 그리운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던 나의 모습은 영락없이 소풍 갈 날짜를 손꼽는 어린아이였다

아무래도 막걸리 익어가는 향기가 자주 피어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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