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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수필-정동순] 쫑이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쫑이
 
 
주얼을 처음 보았을 때는 펄펄한 청춘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안주인과 바깥주인을 차례로 보채어 산책하러 가곤 하였다. 주얼이 내달리는 통에 옆집 아주머니는 개줄을 뒤로 버티며 잰걸음을 하곤 했다

주얼은 호주 양치기 개의 후손이었다. 긴 털에 큰 덩치가 믿음직스러웠다. 주얼은 유머도 있는 듯했다. 우리가 이삿짐을 풀었던 다음 날이었다.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 이것저것 살피는 것으로 나를 엄청 놀라게 하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이웃은 자녀들이 장성해서 분가한 자기 집을 빈 둥지라고 불렀다. 그 빈 둥지 가정에 주얼은 그 이름처럼 보석이었다. 주얼을 보며 우리 아이들이 너무너무 개를 기르고 싶어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개를 기를 수 없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개를 사 주지 않았다. 옆집 주월은 다소나마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울타리 너머로 주얼하고 부르면, 우리 쪽으로 다가와 털북숭이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주얼은 어느 때부터인가 더 이상 산책을 거부했다. 주객이 바뀌어 아주머니가 주얼을 달래어 산책하러 가곤 했다. 새벽에 손전등을 들고 산책하러 나갔던 아주머니가 5분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왔다

주얼이 거부한 것은 관절을 앓은 무릎으로 걷기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몰라주는 야속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주얼이 보이지 않아 안부를 물으니, 옆집 아저씨는 며칠 전에 주얼이 죽었다고 한다. 울타리 철망 저쪽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쫑이는 어머니가 기르던 개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모두 집을 떠나고 난 후, 동무 삼아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밭이나 들에 갈 때, 마실 갈 때마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셨다. 키우던 개가 죽으면 어머니는 그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강아지를 들였다

어머니가 데리고 있던 강아지들의 이름은 언제나 쫑이였다. 우리는 어머니의 강아지들을 쫑이 2, 쫑이 3세로 구분하여 부르곤 했다.

시골집의 앞마당에는 단감이 주렁주렁 달린 나뭇가지가 아래로 휘어져 있다. 마당에서 마루로 오르기 전의 완충지대인 뜰방에는 두어 개 마른 참깨 단이 세워져 있다

쫑이는 뜰방의 한쪽에 있는 자기 집 앞에 앉아 있다. 사진을 찍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에 있는 쫑이의 별명은 삼식이다. 셋째 조카가 취직한 기념으로 할머니께 강아지를 사 드리면서 취직한 회사의 이름을 조합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갑자기 어머니가 편찮으셨다. 자식들이 있는 부산에서 투병 생활을 하시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시골집을 떠나 있게 되자, 쫑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결국, 쫑이도 어머니를 따라 큰오빠 집으로 왔다. 매일 오후, 큰오빠는 어머니와 온천천으로 산책하러 가셨다. 오빠는 어머니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으며 걸음걸이가 무척 느려진 어머니를 다그치며 산책을 권유하였다

어머니는 산책길에 꼭 쫑이를 데리고 가셨다. 주인을 따라 온천천에 산책 나온 다른 강아지들은 털 손질이 잘 되어 있고 발걸음도 경쾌하였다. 모두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듯 목줄도 예쁘기만 했다

쫑이는 빛바랜 초록색 노끈에 의지하여 얌전히 주인을 따라 다녔다. 촌에서 막 올라온 티가 줄줄 묻어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갈수록 어머니 곁을 지키던 쫑이의 눈도 늘 슬퍼 보였다.

쫑이의 부고를 들은 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이 채 못 되어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쫑이는 제 집안에 들어 박혀 밖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쫑이가 이유 없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주인을 잃은 슬픔이 겹쳐졌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주인을 잃은 쫑이의 슬픔이 더 컸나 보다. 쫑이의 죽음 앞에 나는 부끄러워졌다.

채식주의자인 어떤 사람은 자기는 눈이 달린 생물은 먹지 못하겠다고 한다. 아마도 그 사람은 눈빛으로 동물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몇 마리의 개를 기른다. 식물을 가꾸는 내가 애완동물을 기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눈빛을 읽는데 미숙해서 일 것이다. 아니,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그들의 죽음이 두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갔을 때, 고향 집에 들렀다. 어머니가 안 계셔 폐허가 된 뒤란의 장독대며, 잡풀로 무성해진 텃밭을 보았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는 고향집에 와 옛일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즐거웠는데, 어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모든 기억이 다 쓸쓸했다. 뜰방에 있는 쫑이의 빈집 앞에 섰을 때,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람은 사랑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마음 놓고 사랑을 줄 대상이 없을 때 더 외로움을 느낀다. 옆집 주얼의 죽음 앞에 어머니의 쫑이를 다시 생각했다. 쫑이는 어머니가 옆에 두고 마음껏 정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멀리 사는 자식이 못해 드린 것을 쫑이가 했다.

나는 쫑이에게 예쁜 목줄을 사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혼자서 시간을 되돌려 본다.

시골풍의 파마머리지만 산뜻하게 옷을 입은 어머니가 예쁘게 목줄을 한 쫑이를 앞세우고 온천천을 산책한다.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며, ‘엄마, 천천히 가세요’, 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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