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시인(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장)
눈雪
밤사이 고요히
사뿐사뿐 내리신 님,
부끄러운 것들 모두 덮어주셨다.
공원 귀퉁이 서 있는 책장 옆
눈사람이 의젓이 앉아 책을 읽다가
쓸쓸한 엄동설한 의자에
다리 쭉 뻗고 누웠다.
새 가족이 늘어나 화기애애한 공원
그러나 그는 며칠 동안 방문왔다가
어느 밤 조용히 떠났다.
그가 떠난 뒤
상수리나무는 발갛게 눈이 진물러고
책장의 눈망울에 방울방울 얼룩져
눈물로 공원을 흥건히 적셨다.
봄을 품 안에 감추고 왔던 눈
그가 앉았던 자리에 고개를 든 수선화,
아기 봄 반짝 눈을 떴다.
<해 설>
새해 들어 시애틀에 함박눈이 내렸었다. 시인은 눈을 세상의 부끄러운
것들을 덮어준 님, 즉 속세의 죄를 다 용서하신 신의 이미지로 투영시켰다.
시인은 눈을 눈사람으로 치환하여 공원의 가족들을 방문한 새 가족으로 형상화한다. 공원의 식구들과 함께 책을 읽고 휴식을 취했던 그는 이내 조용히 떠났고 정이 들었던 상수리나무와 책장은 아쉬워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러나 눈은 그냥 왔다간 것이 아니었다. 눈은
세상에 아기 봄을 품 안에 안고와 놓고 가신 하나님이시었다. 이같이 평범한 물상과 현상에서 신의 자비로운
임재를 시적으로 표현한 시인의 신앙적 상상력과 기량이 주목된다.
김영호 시인(숭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