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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수필- 이 에스더] 낙엽을 보내며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낙엽을 보내며
 
 
낙엽을 불어내는 블로어의 소리가 요란하다. 지난 며칠 동안 날이 맑았을 때 치웠더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자꾸만 미루었던 게으름 탓에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야 한다.

갑작스런 바람에 낙엽들이 몸을 움츠린다. 마당 구석진 곳에 모여 있던 낙엽들은 서로를 의지하여 바람에 맞서려 안간 힘을 쓴다.

발톱을 세워 바닥을 붙들고 버텨보지만 기계가 만들어내는 강한 바람을 피할 재간이 없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깎인 낙엽들이 가슴을 훑으며 밀려간다.

올해는 내 나무에도 바람이 잦았다. 심한 바람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때가 많았다. 여리고 푸른 잎들과 채 여물지 못한 열매들이 떨어졌다

크고 작은 오해와 갈등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얼굴을 바꾸는 사람들이 가슴을 후벼놓았다. 숭숭 뚫린 구멍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삶을 흔들어 댔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며칠씩 앓곤 했다.

그런 중에도 계절은 부지런히 지나갔고, 한껏 푸르던 잎들은 가을 빛 아래서 저마다 색깔을 드러낸다. 햇살이 나뭇잎에 새겨 놓은 말들을 다 읽지 못했는데, 가을은 벌써 뒷모습을 보인다.

노란 은행잎이 쏟아져 내리는 은행나무 길과 조용한 산사의 단풍나무가 떠오른다. 그 길을 걷는 내내 환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파리 하나하나마다 노란 촛불을 밝혀 놓은 듯했다. 그 길 끝에 이르면 마음이 노랗게 물들 것 같았다. 노란 목도리를 두른 어린 왕자가 불쑥 나타날 것 같아 가슴이 콩닥거렸다.

붉게 물든 나무에 바람이 스칠 때마다 빨간 불꽃이 일렁였다. 천오백 년이 넘도록 한 자리를 지켜온 나무였다. 큰 불길이 이는 듯한 나무 아래에서 나는 <등신불>을 생각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저 불꽃에 너는 무엇을 태우려느냐.’나무가 물었다.

우리 집 앞마당을 둘러본다. 내가 살아온 날 만큼이나 낙엽이 쌓여 있다. 늦가을의 정취도 잠시일 뿐, 마당에 검버섯 자국을 내는 낙엽 치우기가 큰 일거리이다. 제 생의 흔적을 검버섯이라 하니 낙엽의 서러움이 더욱 커지겠다. 바람에 밀려가는 낙엽들이 제 속을 뒤집어 보이며 외친다. 낙엽이 아름답다고 요란을 떨더니 이제는 쓰레기 취급을 한다고, 사람의 마음이 쓰레기더미인 줄 모르고 죄 없는 낙엽만 탓한다며 소리소리 지른다.

블로어가 멎고 마당이 말쑥한 얼굴을 내민다. 마당은 깨끗해졌는데, 소음이 들쑤셔 놓은 정신은 아직 어릿어릿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수없이 되뇌면서 걸어온 한 해였다. 가슴에 제법 굳은 살이 배고 맷집도 좋아졌다. 이제는 아픔이나 미움, 원망과 분노 따위를 끌어안고 있을 때가 아니다. 떨켜를 만들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할 때이다

가지가 부러지고 흔들리긴 했지만, 부러진 가지 틈새로 따스한 햇살이 찾아 들어와 아픈 곳을 만져주었다.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는 중이다.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설 수 있는 이유이다.

마당에 낙엽이 떨어지고 있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마음 조각들이다. 이른 것은 이른 대로, 늦은 것은 늦은 대로 천천히 헤아려보려 한다. 그러다 낙엽이 쌓이면, 맑은 날 함께 거두어 나무 밑동에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줘야겠다. 낙엽과 함께 긴 겨울을 나며, 새 생명을 위한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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