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 25일 (목) 로그인 PC버전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2021년 1월 시애틀N 사이트를 개편하였습니다. 열람하고 있는 사이트에서 2021년 이전 자료들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시애틀 문학] 이한칠 수필가/오늘



이한칠 수필가


오늘
 

 
걷기를 좋아한다. 걸을 때만큼은 생각이 단순해진다. 걷다 보면 복잡한 것들도 깔끔하게 정리된다. 오늘도 나는 회사 근처에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그 길은 시냇물을 끼고 운치 있게 쭉 펼쳐져 있다. 게다가 언제나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른다. 그 소리가 영락없이 어린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재잘거림 같다. 어떤 곳은 시치미를 떼고 묵묵히 흐르기만 하는데, 그 모습이 말수가 적은 나를 보는 것 같아 정겹게 느껴진다.

길섶에는 블랙베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자기들끼리 얼키설키 얽힌 모양새가 맵살스럽기는 하지만, 돌보는 이 없이도 스스로 풍성하게 맺은 열매들을 볼 때면 인내심이 느껴져 대견한 마음마저 든다. 블랙베리의 색깔이 진해질 즈음에는 산책객들의 입술도 덩달아 검붉어진다.      

조금 더 걸어가자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미루나무들이 나를 반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또 한 그루의 밑동이 꺾여 있다. 미끈한 몸으로 오랜 세월을 버텨 왔을 텐데, 하얗고 고운 속살을 훤히 드러내 놓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민망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어느새 그런 나무들이 족히 예닐곱 그루는 된다. 이렇게 쉽게 쓰러지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분명히 비버 녀석의 소행이다. 비버는 강한 턱과 이빨을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나무 밑동을 계속 갉아대면 커다란 나무도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다

잘린 나뭇가지와 둥치를 물속으로 밀고 들어가서 얼기설기 엮어 튼튼한 수상 가옥을 짓고, 그 집을 안전하게 보호할 댐까지 만든다고 한다. 자연을 제대로 활용하는 옹골진 지혜가 대단하다. 쓰러진 나무를 보면 안쓰럽지만, 새로운 퇴적층을 만들어 다양한 생태계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는 비버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따라 가을이 짙게 느껴진다. 붉은 등의 연어들이 떼를 지어 상류로 올라간다. 덕분에 냇물도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넓은 바다로 나갔다가 귀소 본능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들의 행렬이 가히 장관이다. 생존 경쟁에서 용케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 물살을 거스르며 힘차게 헤엄쳐 오르는 그들에게서 강인한 삶의 의욕을 느낀다

새삼 나를 둘러싼 자연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자연의 이치와 그것을 사랑하며 지키려는 사람들의 배려 덕분이리라.

산책로 중간에는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산책길로 연결되는 이 다리는 내게 있어 어제와 내일을 이어 주는 가교, 즉 오늘 같은 것이다. 다리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댄 채 주변을 둘러본다. 매일 보는 낯익은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하류 쪽을 바라보니 유유히 흘러가던 어제가 떠나기 아쉬운 듯 모퉁이에서 꾸물대고 있다. 지나온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꽉 움켜쥐고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조금은 쑥스럽다. 그 참에 몸을 돌려 상류 쪽을 올려다본다

알맞은 속도로 흘러 내려오는 제법 선이 굵고 듬직한 물줄기, 그것은 분명 희망찬 내일일 것이다. 다리 밑을 굽어보니 물살이 거칠다. 서로 앞을 다투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튀어 오르는 형국이다. 아무래도 오늘이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맞을 준비가 덜 된 듯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내일을 맞으려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겸연쩍은 마음이다.

물의 흐름이야 개울의 너비와 깊이, 그리고 물속의 생김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앞으로 가게 될 내 인생길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또 어떤 장애물이 버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제대로 준비 운동조차 하지 않은 채 출발선에 선 마라톤 선수 같다

그 순간, 발 아래에서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그 바위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살을 과감하게 받아 쳐서 작은 구슬 같은 물방울을 공중에 흩뿌린다. 그 모습을 보니 강인하고 풋풋했던 나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생생한 활력이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듯하다.

흔히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리 느껴진다고 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남자의 평균 수명은 80세 안팎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경우 20여 년이 남았는데,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할 것들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건강, 가족, 친구, 그리고 신 나는 일거리 등 중요한 것들이 많다

나는 그 중에서 건강을 으뜸으로 친다. 몇 년 전부터 소금 섭취량을 줄이고 채소와 생선 위주의 식사를 하며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요즘 들어 건강을 나타내는 수치들이 가까스로 턱걸이를 하고 있다. 다행한 일이다.

내일의 흐름을 다독일 수 있는 오늘의 여유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할 것 같다. 오후 일을 마무리하려 발걸음을 옮긴다. 걸음걸이만큼 마음이 한결 가볍다.




분류
Total 32,130 RSS
List
<<  <  688  689  69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