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나무를 기다리며
오라버니, 거름을 몇 포대 사가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에요. 운전대를 잡은 손으로 박자를 맞추며 <고향의 봄>을 콧노래로 부르고 있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꼬옻. 노래에도
나오네요. 도화 행화(桃花 杏花).
옛시에도 많이 나오고요. 고향의 봄은 역시 살구꽃이 피어야
제 맛인 것 같아요. 명옥이집 울타리에 우뚝 서서 고샅 길을 환하게 밝히며 당당하게 마을에 봄을 선포한
나무잖아요.
우리는 미술시간이면 분홍색이 닳도록 도화지에 살구꽃을 피웠지요. 여름 장마에 불어난 개울물이 넘실거릴 때 잘 익은 살구도 울타리 너머로 떨어졌어요. 속살까지 말랑하게 잘 익은 살구는 씨도 쏙 빠져 먹기도 쉬웠어요.
우듬지가
넓어 새들이 많이 쉬어가기도 하고 까치가 집을 얹기도 했어요. 같이 뛰놀던 명옥이를 생각하면 넉넉했던
그 살구나무도 함께 생각나요.
<대추나무에 사랑 걸렸네>라는 농촌 드라마가 있었잖아요. 대추나무도 너무나 다정한 이름이에요. 대추를 가을볕에 잘 말려 제사상에 놓았지요. 한여름 삼계탕에도, 약을 달일 때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재료지요. 쓴 약재들의 맛을
중화시켜주고, 그 맛은 더 깊게 해주는 이 열매의 덕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대추나무 가지가 골고루 펼쳐지도록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두기도 하는데, 어른들은
대추나무를 시집 보낸다고 했어요.
그 말이 야릇해서 깔깔거리고 웃었지요. 저는 대추나무는 겨울에 가장 멋있다고 생각해요. 짚단을 쌓아둔 낟가리
너머로 여기 저기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는 빈 나뭇가지 모습을 한참씩 헤아려 보곤 했지요.
부르고 싶은 정겨운 이름이 또 있어요. 감나무. 유년의 기억에 단감나무가 빠질 수 없지요. 뒷 뜰에 있던 단감나무는
저에게는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어요. 감꽃이 피는 나무 아래에서 소꿉놀이 한 날들의 기억에서는 박수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평온함이 묻어나요.
동생과 저는 그 큰 단감나무 가 지에 줄을 매어 그네를 탔어요. 여름이면 나뭇가지에 기대앉아 책을 읽었어요. 먼 곳까지 걸어 다니던
학교에서 돌아오면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집에 오면 늘 나무에게로 내달렸지요. 아삭,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꽉 차던 단맛. 감을 서너 개는 먹어야 나무에서 내려오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니
더 감사한 나무예요.
두꺼운 감 잎이 서리를 맞아 빨갛게 단풍들 때는 참 고왔어요. 오매, 단풍들 것네. 그 시에도 감 잎이
나오잖아요. 그치요? 늘 풍성하고 맛있는 감을 주던 그 나무는
이제 너무 늙었어요. 그네를 타던 가지는 이제 부러지고, 이
빠진 노인네처럼 새가지를 많이 못내고 있더군요.
그냥 지나면 또 몹시 서운해할 나무가 있어요. 뽕나무예요. 우리 고장에선 집집마다 누에를 쳤잖아요. 사람들은 야산이나 밭둑
어디에나 빈 땅이 있으면 뽕나무를 심었지요. 누에를 치는 계절에 제일 싫은 게 뭐였는지 아세요? 누에는 잘되고 뽕은 한창 모자랄 때예요.
누에가 네 잠을 자고 마지막
뽕을 먹어야 할 때, 뽕이 모자라면 너무나 절박하죠. 어른들은
여기저기 이웃 마을까지 뽕을 구하러 다녀야 했지요. 그것도 안되면 꾸지뽕이라고 야산에서 자생하는 뽕나무를
찾아 다녔어요.
그런데, 뽕을 따다가 오디를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요. 보라색은 아직 안 익어 신맛이나요. 검게 보여야
잘 익은거지요. 입안에 한 움큼 밀어 넣으면 말 그대로 살살 녹아요.
요즘에는 사람들이 오디를 무슨 약처럼 취급하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몸에 좋다고. 가난했던 우리가 자랄 때 먹던 거는 이제 다 건강식품이고 무슨 수퍼푸드래요.
마지막으로 매실나무 이름을 불러줘야 할 것 같네요. 광양에
사는 도수 오라버니가 매실 장아찌를 줘서 먹기 시작했지요. 입맛 없던 그 여름에 매실장아찌 덕에 밥공기를
싹싹 비웠어요. 근래의 요리 강좌에는 매실청을 많이 쓰더군요. 효소도
좋다 하고.
저는 매화꽃 보는 것이 더 기대돼요. 무엇보다
먼 저 새봄을 알려주는 꽃. 게다가 몸에 좋은 열매까지 맺어 주니 이 나무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그 덕이
아주 크지요. 저는 꽃이 피면 선비들이 말한 이 나무의 기개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심을 곳은 있냐고요? 어쩌려고 이렇게 많이 주문을 했냐고요? 저도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허나, 불러보면 이렇게 정다운 이름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앞마당에도
심고, 뒷마당에도 심어서 정원수처럼 예쁘게 가꿀 거예요. 꽃도
예쁘고 열매도 수확하면 참 좋잖아요. 나무들이 커서 열매를 제대로 맺으려면 대여섯 해가 걸릴 거예요. 그것 생각하면 한해라도 빨리 심는 것이 나을 것 같았어요. 아까
확인해보니까 인터넷으로 주문한 나무들이 지금 저에게 오고 있는 중이래요.
저는 새 식구를 맞이하는 것처럼 빈틈없이 준비하고 있어요. 말씀 드린 것처럼 나무를 심을 흙과
섞어줄 거름도 몇 포대 샀고요. 큰 물통도 준비했어요. 나무들이
먼 길 오느라 지쳤을 테니, 흙이 없이 온 나무들은 물에 한 시간 정도 담가 갈증을 달래준 다음 심어야
해요.
나무 뿌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도 혹시나 해서 준비했어요. 나무들이
앉을 자리도 일찌감치 잘 골라 두었지요. 이 나무들이 울창해지면 저는 더 바빠질 거예요. 해마다 가지치기도 해야할 거고, 과일도 솎아주고, 익으면 손질해서 말리고, 나누어주고, 할 일이 정말 많을 거예요.
저는 일 걱정보다 나무를 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나 좋아요. 이 나무들은 그냥 꽃피고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라, 제 추억도 주렁주렁 익게 해줄 것이니까요. 과일이 익을 때, 제 얼굴빛도 햇빛에 맑게 익을 거예요. 그러니 오라버니, 미련하게 일거리 만든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이 나무들을 벗삼아 고향에서 살던 순박한 마음으로 이곳 시애틀에서 살아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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