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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도둑 잡기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도둑 잡기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평온한 밤의 한 가운데를 무참히 찔렀다. 가게의 유리문이 부서졌단다.
토막 난 잠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스프링 튀어 오르듯 일어나 차에 올랐다. 카레이서처럼 차를 몰아 주차장에 들어섰다. 하얀 경찰차 한 대가 을씨년스러운 주차장을 지키고 있다. 기다리고 있던 경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덩그러니 남은 문틀 아래 쏟아져 내린 유리 파편들이 눈처럼 쌓여 있다.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바삭바삭 깔려 있고, 시커먼 도끼 자루가 벽에 세워져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큰 피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피해 상황을 대강 파악하고 리포트 작성을 마친 경찰은 도끼를 수거하여 가게를 떠났다.

깨어진 유리문으로 성큼 들어선 차가운 밤 기운에 가슴께가 서늘하다. 둔기에 맞아 부서져 내린 유리문처럼 남편과 나의 마음도 많이 깨졌나 보다. 하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남편이 곳곳을 점검하는 동안, 나는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쓸어 모은 유리 파편들이 수북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선반 밑 곳곳에 미처 쓸어 담지 못한 유리조각이 불빛에 드러나 보인다. 훔친 물건들을 앞에 펼쳐 놓고 검은 파티를 즐기고 있을 도둑의 송곳니 같다. 가슴이 섬뜩하다. 숨어 있는 도둑이라도 찾으려는 듯 나는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피며 비질을 계속했다.

바닥이 정리되면서 흐트러졌던 마음도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았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형님 댁에 전화를 걸었다. 막 잠자리에 들었다던 형님은 단걸음에 트럭을 몰고 오셨다. 트럭에는 임시로 문을 만드는데 필요한 합판과 여러 가지 공구가 실려 있었다.

어둠의 두터운 자락을 걷어내는 손길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란한 전기 톱 소리에 무거운 마음 조각들이 잘려나가는 듯하다. 곧 합판으로 된 문이 만들어졌다. 번듯하던 가게 문이 애꾸처럼 보이는 게 안쓰럽다

형님은 가게에서 날 새지 말고 집에 들어가 편히 자라고 하시며 서둘러 자리를 뜨셨다. 캄캄한 밤길에 별빛이 내리고 있다. 천사의 날개 같은 그림자가 형님의 등에 드리워졌다.

며칠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유리문을 달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방범 대책을 궁리하던 끝에 유리문에 알루미늄 막대를 가로질러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일을 하다가 무심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상이 낯설어 보인다. 모든 것이 가로줄 무늬를 걸치고 있다. 나무들도, 길 건너 물가도 가로로 잘려 있다.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금속 막대의 가로무늬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바깥에서 보는 가게 안의 모습도 가로무늬를 덧입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이 통째로 감옥에 갇혀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 같다. 유리문에 비친 나도 창살 무늬 옷을 입고 있다.

아뿔싸, 마음에도 도둑이 들었구나. 도둑을 막겠다고 이리저리 설치는 동안 내 안의 빗장이 풀렸나 보다. 슬그머니 들어온 마음의 도둑을 잡아야 한다. 가게에 드는 도둑은 내 힘으로 막을 수 없지만 마음에 들어온 도둑은 내가 잡아내야 한다. 빠질 듯이 빠지지 않는 마음의 창살을 거둬내느라 며칠간 씨름을 했다

드디어 마음에 꼭꼭 숨어있던 도둑이 잡혔다. 눈에 보이는 도둑보다 더 무서운, 그림자 없는 도둑을 잡은 나는 무거운 가로무늬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문득 쇼생크 감옥을 탈출한 앤디가 떠올랐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가로 잘렸던 하늘에 파란 바람이 일고, 물가의 나무에도 초록빛 생기가 돈다. 토막 난 세상이 이어지고,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날아든다.

해질 무렵 바닷가를 찾았다. 물이 빠져 나간 갯벌은 바다의 민낯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따개비가 덕지덕지 붙은 크고 작은 돌들과 죽은 게의 등딱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여느 때와 달리 고릿한 냄새에 코를 찡그린다. 도둑이 다녀간 이후로 한동안 편치 못했던 내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얼마 있지 않아 물이 차오르면 바다는 다시 나무의 그림자를 안고, 하늘의 구름을 담아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낼 것이다. 나도 그림 한 점 그리고 싶다. 밀려드는 바닷물이 내 안에도 채워지도록 마음에 물길 하나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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