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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수필] 가 족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가 족

 
녀석과 첫 대면을 하던 날은 비가 종일 질척댔다
녀석은 산책하느라 떠도는 물기 품은 털이 등에 잔뜩 내려앉아 무척 추레해 보였다. 무엇보다 낯을 가리느라 쭈뼛쭈뼛, 안절부절못하는 꼴이라니. ! 그런데 녀석의 눈, 그 맑고도 깊은 눈동자.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홀린 듯 입양에 동의했다.

녀석은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열어 놓은 창문으로 고개를 내빼며 바람을 맞는 다른 개들과는 달리 얌전하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왔다.

“참 점잔해요.
점잖다니, 멜로디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소개다. 그러고 보니 녀석을 첫 대면할 때도 소리를 내기보다 살랑거리는 꼬리로 답했던 걸 보면 이름은 어쩜 반어적인 표현이었을까. 아무튼 녀석은 졸래졸래 따라와서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요 며칠, 남자와 나는 자주 마주친다. 남자의 손에도 개의 목줄이 들려 있다. 천방지축, 제 앞가림도 못하는 멜로디에 비해 남자의 개는 느긋하다. 킁킁거리며 코를 맞추는 멜로디를 새끼 대하듯 한다. 익숙한 개 몰이로 보아 개와 남자의 동거는 꽤 된 듯하다. 저쯤 가다가 뒤돌아보니 남자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십중팔구 개의 용변을 치우는 자세다.

멜로디가 집안에서 절대 용변을 보지 않는 건 따지고 보면 나름의 수작이다. 하루 종일 빈집을 지키고 있었으니 이 순간만이라도 바깥공기를 쐬게 해달라는 무언의 항의다. 뿐이랴, 너희의 다리에 힘까지 길러주겠다는 갸륵한 심성 아니겠는가. 나는 싫은 내색도 못한 채 녀석을 앞세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도 개를 기른 적이 있다. 아마도 똥개라고 불리는 품종이었을 게다. 제 품격과는 달리 어머니 덕분에 “케리”라는 꽤 스마트한 이름을 가졌다. 녀석의 집은 마당 한구석이었다. 어딜 감히 집안에, 겨울에도 옛다, 담요 한 장을 덧대 주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생선 대가리를 얻어오는 날은 횡재하는 날이었다

유독 내 밑의 여동생만이 제가 먹을 우유를 개에게 줘서 눈총을 받았다. 정말이지 나는 존엄한 인간과 하등동물을 참 모질게 구분했다.

결혼 후 동생은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다. 현관에 마중 나온 녀석을 보며 아파트에서 웬 개새끼냐, 며 핀잔을 주었더니 어찌나 날 향해 앙칼지게 짖어대던지. 조카딸 보기에 민망해서 화해를 청하느라 녀석의 등을 슬슬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손에 먹이를 올려놓기도 했지만, 내 진심이 아닌 만큼 녀석도 방어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으르렁거렸다

그런 녀석이 제 식구의 끔찍한 사랑 속에 18년을 살다 저 세상으로 갔는데 동생이 임종 소식을 전하자 온 식구들이 직장에서 조퇴를 하고 돌아와 슬퍼했고, 조카딸은 거의 식음을 전폐했다나.

지난 번에 고국에 나가 동생 집에 가보니 언감생심, 이번엔 개가 두 마리다. 한 달 만에 어미 품에서 떼어오는데 어린 걸 홀로 데리고 올 수 없어 남매를 같이 데리고 왔다나. 예전에 그 눈꼴신 자비심이 되살아난 듯했다. 문제는 두 마리였다. 어찌나 번잡을 떠는지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덕지덕지 떨어져 나간 벽지하며 컴퓨터 줄을 끊은 게 한두 번이 아니란다. 인터폰이 울리면 저 먼저 손님을 맞는 통에 대화를 못 나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세월 따라 마음이 관대해진 탓일까, 아니면 같은 생명체라는 범상한 생각을 하게 된 탓일까. 그런 녀석들을 내 곁에 앉히고 그렇게도 보채는 고기 한 점씩을 조카딸 몰래 떼어주곤 했다.

그리고 만난 게 멜로디다.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말 수 적은 게 영락없는 우리 식구다. 침대는 절대 안 된다며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고 부산을 떨었는데 엊그제 기온이 팍 떨어지던 날, 나는 멜로디를 침대에 데려왔다. 녀석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데 혹 저를 다치기나 할까, 내가 되레 잠을 설쳤다.

제 새끼 똥은 치워준 적 없는 사내들이 개의 용변을 치우느라 허리를 구부린 모습을 힐난하던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동물과 인간을 엄연히 구분하겠다는 다부진 그 글을 기억하며 나는 지금 구시렁거리고 있다. 그럼, 용변을 그대로 두고 떠나? 빳빳하게 굳어버린 인간의 목이 절로 아래로 수그러지니 이 또한 아니 겸허한가

그러다 불현듯 눈에 띈 작은 생명체에 감탄사라도 나오는 날에는 아, 뉘라서 이런 가르침을 줄까! 꼬리를 살랑거리며 달려들어 인간의 환심을 사는 계략으로 애완견이니, 반려동물의 자리를 꿰찼다고? 머리가 커졌다고 부모가 들어와도 보는 둥 마는 둥 컴퓨터에 빠져 있는 자식새끼들보다 더 힐링이라잖아

익충도, 해충도 다 이 땅에 보낸 게 조물주이거늘, 사람이든 식물이든 개새끼든, 우주의 품에서는 다 같은 생명인 것을. 서정주 시인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윤회 말이다. ! 나는 지나친 궤변론자인가, 만물평등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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