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별세] 민주화 외친 '물태우'…"가장 저평가된 정권" 제6공화국

"물태우라 불러도 좋다"…자유·번영 기틀 닦은 현대사 巨木

 

망언·뇌물 얼룩진 '저평가 정권'…재평가 못 받고 뒤안길로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매우 좋은 별명이며, 나는 물 같은 지도자로 보이는 게 좋다."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두 얼굴의 통치자'로 불렸다. 대통령의 권위를 풍자의 대상으로 내려놓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12·12 군사반란을 주동한 '독재자의 후예' 꼬리표를 평생 떼어내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도 명암(明暗)이 극명하다. 5공화국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이룩했지만 문민정부(文民政府)의 칭호는 김영삼 정권에 넘겨줘야 했다. 자유와 독재, 번영과 비리가 혼재했던 '전환의 시대'를 돌아본다.

◇"물태우 불러도 좋다"…5공 청산하고 '마이카 시대' 열어

노태우 정부는 '5공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제6공화국 첫 정권이다. 정부 수립 직후 청와대와 내각에 있던 군부 인사를 해임하고 민간인 출신 전문가를 대거 기용했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김종인 당시 민주정의당 의원을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하고 '대쪽 판결'로 유명했던 이회창 당시 법관을 복직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군사정부의 비리도 속전속결로 청산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퇴임 2달 만에 큰형 전기환, 사촌 전순환, 처남 이창석 등 친인척 8명이 구속수사를 받았으며, 전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백담사에 사실상 유폐됐다.

노태우 정부는 이후 '자유'와 '경제'에 눈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이 1988년 신년사에서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발표한 이후 TV 방송과 코미디에서 '물태우'가 퍼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6·29 민주화 선언도 착실하게 이행했다. 표현의 자유를 옭아맸던 '언론기본법'을 폐지했고, 정기간행물 등록을 개방했으며 신문 지면과 구독료의 자율화를 보장했다. 월북 작가의 작품을 해금(解禁)한 것도 이때였다.

'삶의 질'도 비약적으로 윤택해졌다. 노태우 정부 5년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7%씩 고공 성장했다. 특히 임금 상승률이 115% 급증하면서 1가구마다 자가용을 살 수 있는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다. 정권 말기인 1992년에는 중산층 비율이 76%에 육박했던 '번영의 시대'였다.

1989년 국민의료보험제도를 개정해 의료보험 수혜 비율을 92%까지 끌어올렸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4년간 272만호를 공급해 주택보급률을 크게 높였다.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수도권 신도시 계획 사업'도 노태우 정부의 작품이다.

'외교 정책'도 주요 성과로 꼽힌다. 냉전 이후 최대 규모로 열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회하면서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련·중국·베트남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맺은 '북방외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끌어낸 '대북정책'도 대표적인 업적이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12·12, 5·18과 관련해 법정에 서 있는 모습 © News1


◇망언·뇌물 얼룩진 '저평가 정권'…명암 남기고 뒤안길로

노태우 정부는 민주주의 제도를 마련하고 번영의 기틀을 닦았지만 보수세력으로부터는 '유약한 정권'으로, 진보진영에는 '군사독재의 잔재'로 불리며 어느 쪽에서도 평가를 못 받은 정권이다.

먼저 고문수사, 민간인 사찰 등 군사정권의 잔재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5공화국 핵심 세력인 '하나회'가 건재했고,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사건과 이철규 의문사 사건, 오홍근 테러 사건 등 탄압이 잇따랐다.

급격한 경제 발전도 그림자를 남겼다. 단기간에 부동산을 대량 공급한 탓에 건설경기 과열, 자재파동, 부실시공, 집값폭등, 물가상승 등 연쇄 부작용을 낳았다. 정경유착이 만연하면서 '뇌물공화국', '재벌공화국'이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뇌물 파동'은 1995년 노 전 대통령이 4000억원대 비자금을 축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절정에 달했다. 삼성, 현대, 대우, LG, 롯데, 한화, 기아 등 재벌 대다수가 비자금 조성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차라리 내가 정치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은 '쿠데타의 주범'이라는 비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1995년 10월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한 것을 보면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 5·18 망언으로 거센 비난을 샀고, 청산 대상이었던 전 전 대통령과 나란히 법정에 섰다.

결국 노태우 정부는 '가장 저평가된 정권'으로 남았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5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는 정치·경제·외교에 대한 일반인 평가에서 역대 정권 중 최하점을 받았다.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가 학자 500명을 설문한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4위를 차지한 것과는 괴리된 평가다.

1987년 직선제로 선출된 첫 대통령이자,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된 대통령.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이룩했지만, 수의(囚衣)를 입어야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재평가를 역사의 과제로 남긴 채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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