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삭제된 메시지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삭제된 메시지


그날 협회 행사는 비대면으로 이뤄졌다. 코로나 시대의 별스런 만남의 현장이지만 다들 꽤 익숙해졌다. 화면을 죽 돌아보니 손님 중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행사가 끝나고 감사 인사도 할 겸 안부를 전했다. 곧이어 간단한 회신이 왔다. 그런데 한참 지난 후에 보니 또 하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얼굴이 좋아 보였습니다.”

쿡, 웃음이 났다. 역시 숙맥이다. 하긴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도 이처럼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그의 숙맥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왕이면 좀 듣기 좋게 말하지. 활기차게 보인다던가, 아니면 운동하시나요? 건강해 보입니다, 라던가. 환심을 살만한 말이 오죽 많을까. 

내가 듣기 민망한 말 중 하나가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말이다. 나는 얼굴이 살찌다. 뭐 얼굴뿐일까마는. 게다가 얼굴형이 둥글다. 단체 사진 찍을 때마다 투실한 얼굴이 퍽 난처하다. 아닌 게 아니라 코로나를 핑계로 집에만 있다 보니 체중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메시지 위 칸에 다른 메시지 하나가 삭제되어 있다. 무슨 말을 했길래 지웠을까. 순간 상상이 꼬리를 문다. 다음 메시지로 상상하건대 이렇게 적지 않았을까.

“살쪘군요. 얼굴이 달덩이 같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연히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셨던 허만길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그간 선생님은 교단에 있으면서 주경야독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최현배, 허웅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한글학회에 맥을 이었으며 시인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도 수립되지 않은 때, 표적 없이 중국인이 사는 상해 임시정부 자리를 찾아내어 자리 보존 운동을 펼치셨다.

나는 어릴 때도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문학 활동을 같이하게 돼서 선생님이 더 반가웠다. 내 작품수록이 된 책이 나오면 보내드리고 안부를 전하다 보니 선생님과 카톡이 잦다. 한번은 한국일보에 게재된 글을 보내드렸더니 미국에서 한국일보가 교민들이 아끼는 신문임을 안다면서 반가워하시며 격려해 주셨다. 그런 얼마 뒤 삭제된 메시지 하나가 떴다.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맞춤법이나 어법에 틀린 말을 지적하셨을까, 아니면 산만한 구성수법을 나무라셨을까, 그도 아니면 이민의 땅에서 작가의 역할에 대한 말씀이었을까. 나는 슬쩍 모른 척했다. 

어릴 때 <셜록 홈즈> 전집을 재미있게 읽었다. <괴도 루팽>에 빠지기도 하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오리엔트 특급열차> 같은 책도 읽었는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로 가득한 재미는 무더운 여름의 빙수였다. 김성종의 추리소설에도 한동안 빠져 지냈다. 오늘 삭제된 메시지에 촉수를 세우는 건 그 영향력 때문인지 모르겠다.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고 한다. 공소시효를 훌쩍 넘긴 뒤에도 밝혀지는 범죄를 보면 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어찌 흔적이 없을까, 초동수사에 실패한 때문인지 모른다. 수천 년이 지나고 발굴된 시신도 주인을 찾아내는 시대가 아닌가. 삭제된 메시지 또한 지금은 사라진 문자라 해도 다음 어느 세대엔 그 문자들을 전부 복구해서 주인에게 되돌려 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면 한국의 주민등록은 말소된다. 한국인으로서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다. 한국에 입국할 때도 외국인으로 입국한다. 한국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머리카락 색은 여전히 검은색이고 눈은 갈색이다. 피부는 유색이고 말도 한국어에 능하다. 한글로 된 책을 읽고 한글 검색기를 이용한다. 시민권자 한국인치고 자신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작 한국에서는 흔적을 지웠는데 본인은 여전히 해바라기다. 삭제된 메시지다.

가끔 삭제된 메시지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슬쩍 지워버린 말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질책보다 사랑을 느낀다. 받는 이의 마음을 다칠세라 보낸 이의 고심이 엿보이는 공간이다. 그건 그만큼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삭제된 메시지가 말한다.

“누님,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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