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좋은 시-이성호] 홍시

이성호(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홍시


고추 꼭지를 따느라 정신이 없던 노파는 갑작스레 

불어오는 회오리 바람에 가위 잡은 손 놓고

세개 남은 감이 홍시로 익어가는 감나무를 올려다 본다

유년시절 남달리 홍시를 좋아했던 그녀 인지라

시집올 때 가져다 심은 감나무 이엉에서 한 길이나 더 자랐다

토담너머로 들려오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에

노파는 학교에 간 코흘리개 여덟 살짜리 손주 녀석 얼굴이 그려진다

홍시 다음으로 엿을 좋아해서다 하지만

봄과 여름을 지나는 동안

헤진 고무신도 낡아서 못쓰게 된 양은그릇도 구멍 난 솥도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못하다 


바람이 잦았다 싶어 가위질 이어 가려는데

난데없이 두 마리 까마귀 날아와 홍시 달린 가지에 앉는다 

오매구지 날마다 홍시타령인데

순간 불안해진 노파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눈길은 싸리문에서 홍시 달린 가지로  까마귀에 바삐 오가는데

얄미운 까마귀 가지에 주둥이를 문질러 대는 꼴이

때 이른 저녁 상을 차릴 모양이다


감나무에 걸쳐놓은 있으나마나 왕대 사다리

이태 전에 죽은 영감의 짓인데 이를 어쩌나

다시금 노파의 가슴은 까맣게 타 들어간다

겨우 새어 나오는 저항 이기에는 힘없는  

“훠이, 이놈의 까마귀, 그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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