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간만에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간만에


귀찮아. 이불 속에서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두 손은 널찍한 엉덩이 밑으로 밀어 넣었다. 하얀 천장에 아주 작은 거미가 기어가는 게 보였다. 나무 많은 시애틀에 살다 보면 이런 장면은 일상이다. 예전 같으면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다가 남편을 부르다가 휴지를 둘둘 말아 쥐고 난리를 부렸을 텐데. 눈을 껌뻑였다. 거미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너도 귀찮은가 보구나. 그렇게 눈을 몇 번 더 껌뻑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옆집 처마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했다. 처마는 주인이 잘 치워주지 않아 늘 작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쌓여 있었다. 비가 오면 얼른 좀 가라고 고인 물이 그것들의 등을 떠밀곤 했다. 그런데도 육중한 몸은 좀처럼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 그러니 옆으로라도 비집고 나아갈 수밖에. 물은 옆으로 흘러넘쳐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뭉텅이로 떨어진 빗물이 ‘툭’하고 묵직한 소리를 냈다. 마치 아이들이 물풍선을 바닥에 메다꽂은 것 같았다. 

몸을 틀어 태아 자세를 하고 누웠다. 이불 끝자락도 끌어당겨 얼굴 반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뭘 하지? 늘 하는 일 말고, 오늘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고민했다. 코로나 19 사태로 외출이 쉽지 않아 집에 몸 붙인 지 벌써 오 개월이 다 되어간다. 주변인들에게 연락해서 뭘 하며 지내냐고 물으면 되돌아오는 답은 매한가지였다. 그냥 똑같지 뭐. 

우리는 요즘 ‘그냥 똑같은’ 하루를 산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단조로운 삶. 그러는 새, 창밖 풍경은 분홍색 꽃이 피고 지고, 연둣빛 아기 잎새들이 나뭇가지에서 탄생하다가, 이젠 옆집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록 나뭇잎들이 무성해졌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창 하나로 깨닫는다. 

벽에 난 창이 오늘따라 유난히 신비로워 보인다. 창은 문이나 벽처럼 공간과 공간을 나누고 있지만, 결코 꽉 막히지 않은 시원함이 있다. 때론 매일 그림을 바꿔 거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햇빛 때문에 오렌지색을 머금은 나무 그림이 걸리는 날도 있고, 오늘처럼 빗방울이 그린 직선들 때문에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 그림이 걸리는 날도 있다. 

간만에 특별한 요리를 해 볼까?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세상 모든 요리법이 다 들어있다는 앱(App)의 창을 열고 희미한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봤다. 만두전골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냉동실에 넣어둔 만두 한 봉지가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만두만 있으면 뭘 하나. 배추도, 버섯도, 유부도, 대파도 뭐 하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그냥 창을 닫았다. 그렇다면 돼지고기 꽃빵 샌드위치는? 하지만 이내 우리 집에 꽃빵이 없다는 사실에 다시 낙담했다. 창을 닫으며 속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간만에’는 무슨, 다 귀찮아.  

천장에 거미가 언제 옮겨갔는지 창가 쪽 벽에 붙어 있었다. 혹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밤새 덧붙은 게으름을 털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밖 수많은 ‘간만에’와 눈이 마주쳤다.

뜨거운 날이 계속되어 지쳐가는 땅과 나무, 꽃들 위로 간만에 시원한 비가 쏟아졌다. 그린 하우스 천장을 열기 위해 나온 옆집 사람과 간만에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랫동안 눈부셔 보지 못했던 하늘도 간만에 올려다봤다. 그리고 창가에 너그럽게 팔을 펴고 있는 널찍한 소파에 앉아 간만에 한참 동안 빗소리를 들었다. 간만에 귀찮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창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걸까. 나도 움츠렸던 몸을 펴고 창밖으로 나갈 때가 된 듯하다. 책상에 앉았다. 한 달 동안 쉬었던 머리를 주물러 본다. 뭐 대단한 것이 나오지 않더라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고, 조금씩 생각의 창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다시 한번 워드 창이 열리고 새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간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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