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생활-김 준] 누가 살인자인가(상)

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누가 살인자인가(상) 


살인이란 물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을 빼앗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불러오는 증오, 질투, 분노, 심지어 욕설까지도 같은 죄로 간주하셨습니다. 이밖에도 인간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살인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시각적인 호기심을 끌기 위해 인체에 해로운 색소를 식품에 사용하는 일, 제조한 약품에 인체에 해로운 요소가 있음에도 그 사실을 숨겨둔 채 특정 부분에 효력이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킨다면 그것도 환자들의 생명을 점진적으로 해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이나 기호물을 남에게 권하거나 건강을 좀먹는 여러가지 쾌락에 탐닉케 하는 것도 모두다 간접으로 인명을 빼앗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신체적인 위험을 겪게 한다든가 무모한 모험을 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고용인들을 불완전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도 인명을 해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의 살인도 있습니다. 정신력을 약화시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고 좌절 속에서 희망을 잃게 하고 절망에 빠뜨려 삶의 의욕을 상실케 하는 일들은 육체에 가하는 치명상만큼이나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일본의 작가 아쿠다 가와는 그의 문장이 대단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내용은 거의가 다 인간이 추구하는 현실적인 행복의 극치로 끌고 가지만 결국은 허무로 끝나고 맙니다. 왜 인생을 그토록 아름답게 묘사하고 행복의 최고조대까지 이끌면서도 그 결과는 허무로 마감하게 될까요? 

그것은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인간의 행복과 삶의 아름다움이 어떤 높은 목적과 영원한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행복이요 곧 시들어버릴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순간적인 것이요 순간적인 것은 조만간 허망한 종말을 고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 순간의 행복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들이 무너질 때 나타나는 절망과 허무는 그만큼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그 책을 판매금지까지 시키려고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될까봐 금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우수한 철학자 쇼펭하워는 무신론자요 허무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인생을 헛되고 허무하다고 보면서,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래도 태어났다면 될수록 속히 죽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권은 자살할 권리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독일과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이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쇼펭하워 자신은 그가 한 말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한때 그가 살던 부락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당국은 전염되지 않은 주민들을 수 킬로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때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이 쇼펭하워였습니다. 그리고 몇달 후 전염병이 사라져 다시 본고장으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있은 후에는 그가 맨 마지막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쿠다 가와나 쇼펭하워는 사람의 생명을 물리적으로 빼앗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사상과 철학으로 생의 의욕을 말살시키고 이상을 소멸시켜 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생명을 스스로 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밖에도 잘못된 종교로 세뇌시켜 무고한 신도들로 하여금 집단자살을 하게 만드는 사교들이 우리나라 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나타났고 앞으로도 그러한 사이비 종교들이 인간을 불행으로 몰고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음 칼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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