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왜 책은 쉽게 버릴 수 없는가

문해성 수필가

 

왜 책은 쉽게 버릴 수 없는가


찰깍!

카메라 앞에서 딸기가 가득 담긴 상자를 안고 모든 것을 가진 듯 폼을 잡아본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딸기는 더 싱싱해 보인다. 순간, 수확한 농산물을 안고 농부가 환한 미소를 짓는 포스터가 떠오른다. 나도 그런 표정을 짓고 싶다.

시애틀에 살면서 여름보다 더 기다려지는 계절이 있을까. 맑은 날씨와 늦게까지 떠 있는 해가 야외활동을 부추긴다. 하이킹, 조개 캐기, 낚시, BBQ파티 등등. 그중에 U픽업 농장에 가서 과일이나 채소를 수확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유월 중순쯤부터 딸기를 시작으로 체리, 블루베리, 상추, 고추, 사과까지 바쁘게 농장을 들락거린다. 직접 딴 과일을 입에 넣으면 마트에서 산 것과 어찌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아삭한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한입 물면 여름을 온통 삼키는 듯한 그 맛을 말이다. 

다 키워놓은 농산물을 수확해 오면서 농부가 된 듯한 착각을 하지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농부는 자식 기르듯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짓는다. 거기에 적당한 비와 햇볕의 조화가 없으면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봤을 것이다. 구름의 모양과 바람의 방향을 보고 일기를 예측하기까지 농부는 얼마나 많은 열정을 흙에 쏟았을까. 딸기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이유다.

요즘에는 먹고 싶은 채소와 과일을 어느 때나 쉽게 구할 수 있다. 건강을 챙긴다며 장바구니에 제일 많이 담는 것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류이다. 그런데도 우리 집 냉장고 안에서 시들거나 상해 가장 많이 버려져 나가는 것도 채소와 과일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따온 과일이나 채소를 버리는 일은 별로 없다.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 

책상 앞에 앉자 가득 쌓인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곧 읽어야지 하면서 책장에 꽂지도 않고 쌓아둔 정기구독 문학지며 어렵게 구한 책, 소속 단체에서 받은 책, 한국에서 배달 된 책들이다. 오늘따라 나를 바라보는 책들의 시선이 따갑다. 이러고도 정말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내 책장에는 한글책이 없었다. 한국어로 된 책이 생기면 꼼꼼하게 몇 번을 읽었다. 한국에 나갈 때면 하루 이틀은 꼭 교보문고에 가는 일정을 잡았다. 몇 년 사이 책장에는 한글책이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은 점점 많아지지만 정작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진지하게 다 읽지 못한다. 돋보기를 써야 할 때쯤에는 손에서 거의 책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사 모았다.

마트에 가면 먹거리가 넘쳐나는 것처럼 세상에는 매일 새 책이 쏟아져 나온다. 책을 내는 일이 예전과는 달리 어렵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책 중에 자신에게 꼭 필요한 책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책에 대한 리뷰를 해주는 책과 방송도 많다. 가히 출판물 춘추전국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이 짐이라고 했던 노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젊은 날에는 책만 있으면 더 부러울 게 없었는데 노년에 와서는 책 때문에 편하게 살 공간을 잃어간다고 했다. 학교 도서관에 기증이라도 하고 싶지만 받아주는 곳을 찾는 일이 여의찮다고. 대학도서관마다 포화 상태라 책 기증을 받아 보관할 공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 꺼린다고 했다. 당시 책을 많이 읽고 싶었던 늦깎이 유학생으로서는 노교수의 고민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책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국제 이사 때는 중요한 것이 아니면 버리자고 맘먹었다. 옷가지나 살림살이는 쉽게 버리면서도 책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왜 책은 쉽게 버릴 수 없을까. 책이 마치 양식처럼 소중하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렇다면 필요한 양식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냉장고 안에 음식이 가득 들어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어쩌면 죽을 때까지 책을 버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많은 책이 세상에 나온다 해도 그것이 나오기까지 글쓴이의 진통을 무시할 수 없다. 짧은 글 몇 자 쓰기도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쏟은 작가의 노력은 한 톨의 씨를 싹틔우기 위한 농부의 노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본다. 수많은 책 중에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만난 책들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마음으로 책상 위에 쌓인 책부터 읽어야겠다. 

딸기가 유난히 달다. 싱싱한 딸기를 맛있게 먹는 것으로 농부에게 감사함을 대신 전한다. 올해도 직접 딴 과일 상자를 안고 행복한 농부처럼 활짝 웃는 사진 한 장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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