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정동순] 기승전닭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기승전닭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울보, 까만 조약돌, 하구잽이에 이어 기승전닭. 만날 때마다 닭 얘기를 한다고 놀리듯 누가 나에게 붙인 별명이다. 반려동물이라면 대부분 강아지나 고양이를 떠올리는데 우리 집은 닭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은 가족들의 안부보다 먼저 닭의 안부를 묻는다. 닭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자세히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닭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 변명하자면 할머니의 손주 자랑, 낚시꾼의 월척, 쇼핑 정보 등, 사람은 누구나 관심이 많은 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미국 직장에서는 동료들 사이의 소소한 대화가 참 중요하다. 스몰 토크나 채팅은 일하는 시간을 축내는 쓸모없는 잡담이 아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사소한 대화는 서로에 대한 서먹함과 긴장감을 풀어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정치나 종교, 사회적 이슈처럼 관점이 달라 언쟁으로 갈 수 있는 화제는 금물이다. 오히려 팀워크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포츠, 반려동물, 취미, 가벼운 일상에 관한 얘기는 비교적 안전한 주제다.

동료들과 말은 해야겠고 안전한 화젯거리를 찾다 보니 내 일상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닭이 늘 주인공이 되었다. 자녀나 남편에 대해서는 잘하는 이야기를 하면 자랑이 되고, 흉을 보면 형편없이 그들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대화의 뒷맛이 깔끔하지가 않다. 눈치 없는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정치색도 없는 닭 얘기는 내가 좀 푼수처럼 보일지언정 뒤끝을 걱정할 일이 없다.

우리 닭들은 근무하는 학교 직원들도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그만큼 닭 얘기를 했다는 뜻이다. 어느 날, 활짝 핀 사과꽃 그늘 아래서 그림처럼 놀고 있는 닭 사진을 교사들의 대화방에 올렸다. 마이크가 문자를 날렸다. 왜 갑자기 배가 고프지? 조금 후에 로스가 받아쳤다. 닭들이 다 어디 갔지? 한 마리도 안 보이네. A dingo ate my chickens! (호주 들개가 다 잡아먹었어). 싸인펠드(Seinfeld)란 미국 시트콤의 유명한 대화를 패러디한 내 대답에 사람들은 LOL이다. 그날 마이크는 딩고가 되었다. 이런 농담 따먹기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가슴에 울혈처럼 뭉쳐 있는 갑갑증을 풀어준다.

인간관계에 있어 침묵은 오해를 부르기 쉽다. 저 사람이 무엇엔가 화나 있나, 기분이 안 좋은가, 혹은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가? 더구나 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침묵을 잘 견디지 못한다.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며 조신하게 앉아 있는 것은 나에겐 고문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상대방이 얘기하게 만들고 잘 들어 주어야 대화의 고수인데, 나는 아직 그 기술을 써먹지 못하고 내 얘기를 위주로 하는 하수다. 

돌이켜 보니, 침묵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는 습관은 꽤 오래된 듯하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십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골목길을 내려가면 경화가 살고 있어 가끔 같이 신작로를 걸어 학교에 갔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는 것이 이상해서 내가 무슨 말을 건네면 경화는 늘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리 집에 어제 병아리 깠다. 그래서? 응? 그래서? 너무 귀엽다고. 그래서? 경화는 침묵이 더 나은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때 경화가 왜 그랬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배워서 남 주자’로 밥 먹고 사는 선생인지라, 학생들에게 질문했을 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상황도 침묵을 못 참는 내 급한 성미를 부채질한다. 의견을 말하고 후회할지언정, 남의 의견에 묻어가려 하지 말라는 적극성을 주문하곤 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기회주의자의 비겁한 태도라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배우는 교실에서는 침묵은 절대 금이 아니기에.

한데 요즘, 사람에게는 인품을 완성해 주는 언품이 중요하다는 것을 책을 통해 배운다. 디누아르는 <침묵의 기술>이란 책에서 침묵은 가장 강력한 언어라고 소개한다. 침묵은 나를 다스리고 타인을 움직이는 기술이라고 갈파한다. 지혜에서도 상책은 침묵이고, 중책은 말을 적당히 적게 하는 것이며, 말을 많이 하면 하책이라 한다.

언행에 관한 어떤 분의 글도 마음에 와닿아 수첩의 첫 장에 써 놓았다. ‘말이 많으면 반드시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오기 마련이고 실수를 범하게 되므로 사람이 경박스럽게 보인다.’ ‘칭찬하는 말도 조심해서 하고, 청하지 않으면 충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진중하게 대해 보기로 작정하고 말을 줄여 볼까 한다. 기승전닭이란 가벼운 별명에서 벗어나 나의 언품을 도모해 보고자 한다. 

한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리 식구는 모두 닭을 귀애한다. 뜻밖에 얻은 수탉 봉구 이야기부터 닭에 대한 화제는 늘 넘쳐난다. 그러니 닭 이야기가 지겨운 사람은 내 앞에서 ‘닭’은 금지어다. 계란이나 병아리 등 닭을 연상시키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코가 풀린 실타래처럼 닭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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