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홍준] 봄을 키우는 재미

김홍준 수필가(오레곤문인협회 회원)


봄을 키우는 재미


심술궂은 겨울이 4월 중순이 되어 물러갈 때가 되었는데도 물러갈 줄을 모르고 질척거린다. 온실 안에 긴 겨울잠에서 깨어 싱그러운 봄이 왔다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 머루 덩굴과 새로 돋아난 부추 그리고 호박 떡잎 귀여운 새순을 모질게도 짓밟아 얼려 놓고서야 떠났다.

이곳은 지대가 약간 높고 깊은 산악지역이다 보니 갑작스러운 추위가 빨리 찾아오고 동장군이 물러갈 때도 다른 곳보다 더욱 늦게까지 심술을 부려 놓고 떠날 때가 많이 있다. 올해 봄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깥 세상보다 따스한 온실 속에서 방금 올라온 각종 새싹을 심술궂게 짓뭉개 놓아서 끝이 누렇게 타들어간다. 머나먼 미국으로 한국에서 시집온 진달래꽃이 봄이 왔다고 연분홍 얇은 치마를 입고 나왔다가 꽃잎이 얼어서 누렇게 얼어 떨어지고 말았다.

귀엽고 여리디여린 새싹이 흙을 밀치고 올라오는 새 생명 탄생의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부지런 떨면서 2월 하순에 뿌린 각종 채소 씨앗들은 너무 일찍 심었는지 나올 기색이 없다. 

할 수 없이 다시 씨앗을 심고 매일 물을 뿌려주고 사랑으로 돌보았더니 상추 쑥갓 호박 오이 나팔꽃 분꽃 작약 목단 금낭화 등등 각종 채소와 화초 그리고 금전초 갓 부추 머위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뽕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포도나무 자두나무 체리 나무 단풍나무 으름덩굴 하수오 덩굴과 내가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두릅 나무순도 나와서 재롱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에서 보다 맘껏 먹을 수 있는 두릅나물은 이 지역 기후와도 잘 맞고 미각도 사로잡아 나를 기쁘게 해준다.

밭에서는 싱싱하게 겨울을 나고 늠름하게 자라고 있는 대파 쪽파 그리고 마늘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돼지감자가 방긋이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지난 가을에 씨를 뿌려 놓았던 상추가 모진 겨울을 나고 이른 봄부터 효자 노릇을 한다. 월동한 이른 봄의 상추는 보약과 같은 존재감을 나타낸다. 6개의 커다란 화분에 모종해서 키운 돌나물이 마치 콩나물 시루에서 자란 것같이 싱그럽고 풍성한 찬거리를 제공해 준다.

우리 밭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곰취나물은 나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존재다. 산나물 중에 으뜸이 취나물이라 하는데 곰취는 그 중에 나물의 제왕이라는 말도 있다. 먼저 살던 분이 심어 놓았는지 몇포기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온 밭을 제패할 기세다.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노란 꽃을 피우고 며칠 후에는 마치 민들레꽃같이 낙하산을 타고 온통 씨를 흩날려 놓는다. 또한 뿌리가 한도 없이 뻗어가며 새끼를 치고 마치 숙주나 물과 같은 뿌리는 너무 쉽게 부러진 마디마다 새순이 돋아나서 완전히 제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봄 한 철 즐기는 다른 산나물과 달리 봄부터 가을까지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난해 봄, 길 건너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집에서 두어 가지 꺾어 다 여러 토막을 내어 심은 수국 꽃나무가 모두 살아서 10여 그루가 되었다. 올 여름에는 시원한 수국 꽃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다년생 여러 종류의 꽃들이 가을에 줄기가 마르고 성장을 멈추었다가 새봄이 되었다고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새싹을 볼 때마다 반갑고 경이로워 온종일 텃밭을 돌아보며 가꾸는 것이 즐겁다.

지난해 봄 몇 포기의 딸기가 잔디밭에서 근근이 살아있는 것을 찾아내어 밭에 옮겨 심고 가꾸었더니 탐스럽고 맛있는 딸기가 열렸다. 아마도 몇 해 전에 살던 분이 가꾸던 것이 도망쳐서 잔디밭에 뿌리를 내리고 고생하던 것 같다. 기름진 밭에 옮겨 심고 가꾼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탐스럽게 열매 맺는 것을 본 후 올해에는 100여 포기로 증식시켜서 네 곳에 딸기밭을 만들어 놓고 돌보는데 이른 봄부터 하얀 꽃을 피워 대며 왕성하게 자란다.

원래 희망이라는 것을 살 수도 없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인데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또한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설정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할 때 내 것이 되는 것 같다. 

까짓 것 사다 먹으면 되지 귀찮게 키우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나만의 행복을 찾고 사랑으로 돌보며 느끼는 그 맛을 알기나 할까?

2년 전까지 10여 년을 살았던 워싱턴주 밴쿠버 지역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편의점을 운영할 때 주위에 많은 무숙자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나름대로 약간의 도움을 베풀었더니 소문이 나서 더 많이 몰려오고 가게 주위를 지저분하게 한다고 건물주가 리스 연장해주지 않아 많은 권리금을 주고 산 가게를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나와야 했던 아픔이 있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했는데 어이없이 당한 아픈 상처를 이렇게 좋은 곳으로 옮겨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화려한 공작새 8마리의 재롱과 10마리의 토종 닭과 두 마리의 오리들이 넓은 풀밭을 제 마음대로 다닌다. 무공해 달걀 가운데 우리가 다 먹지 못하는 알과 각종 채소를 나누며 화초, 과일나무들이 예쁘게 자라는 봄을 키우는 재미 속에 이러한 것들을 돌보고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베푸신 은혜가 무한 감사하기만 하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