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김혜자] 버리고 싶지 않은 유산

김혜자 수필가(오레곤문인협회 회장)

 

버리고 싶지 않은 유산

 

한 해가 또 지나간다. 손끝으로 잡을 수도 없는 세월이 끊임없이 쉴 사이도 없이 흐른다. 쉽게 지워지지 않은 모든 그리움도 내 뒷모습처럼 사라지고 있다. 

나의 손때가 묻은 묵은 물건도 가버린 세월의 흔적처럼 버려야 하는지? 잡을 수도, 잡히지도 않는 세월이 간다. 나는 알 없는 미지의 떨림으로 신년을 맞이한다. 버리고 싶지 않은 유산처럼 내 망막에 새겨진 나의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 지하철 교통이 잘 되어있기에 자주 이용했다. 매번 느끼는 일이었지만 지하철 안에 사람 대부분 스마트 폰에 빠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피곤한지 잠시 눈을 감고 있고 책을 보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이동 통신의 꽂이라고 불리는 휴대 전화기. 다능한 칩과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최고의 우리나라 기술로 천연색 화면은 물론 방송, 사진까지 보고 즐기는 정보시대의 생활 단면이다. 현대인의 삶은 한마디로 초고속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특히 시중에 나와 팔리는 전자제품들의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 몇 년 전에 산 텔레비전도 지금은 구식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쓸 만한 것이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니 보기에 안쓰럽고 곤혹스럽다. 

새로운 음악도 하루가 멀게 탄생하여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헌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새것이 나오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남보다 먼저 새 물품을 가져야 우월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유행에 첨단을 따라 입고, 쓰고, 신고, 마시며 현대인은 생활한다. 

헌것은 무엇이며 새것은 무엇인가? 자주 쓰지 않는 것은 낡은 것이고 새로 만들어진 것을 애용하는 것이 최신식인가? 낡은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새롭게 얻는 정보를 통하여 빠른 의사의 결정을 하며 즐기는 것이 현대인이 되는 지름길인가? 

의복도 철마다, 유행을 따라 민감하게 변하고 모든 것들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구매되고 소화된다. 개인이 만든 수예품이나 재봉 기술로 만들어진 옷들은 특수층에게서만 소화할 수 있는 고가의 진품으로 판매된다. 옛날 양복점이나 양장점은 무성 영화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추억거리로 되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해가는 하루의 생활 속에 지인의 초대로 우연히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옹기 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미국에 사는 나에게는 새롭게 보는 진귀한 전시관이었다. 20여 년간 수집해온 옹기와 장독대를 보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엄마의 젖가슴에 푸근한 향수가 온몸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생활문화가 바뀌고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 항아리. 어떻게 항아리 속에 담은 그 많은 말을 다 담아 놓을 수 있을까? 그 속에는 한국 여인의 희비애락의 삶이 있다. 

나 또한 진열된 빈 항아리 속에서 지금은 먼 별나라에 있는, 술래잡기하던 내 동생의 얼굴과 나의 어리고 고왔던 시절을 보았다. 놓치고 싶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귀한 순간들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항아리 속에서 풍겨 나왔다. 

민족적이고,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정서가 듬뿍 담긴 항아리. 된장, 간장, 고추장 그리고 땅을 파고 묻던 김장 김치 항아리. 한 포기, 한 포기 차곡차곡 정성으로 만든 엄마의 손맛으로 만든 사랑의 음식. 물로 채운 항아리 속에 고여 있는 달을 보며 꿈을 그리던 어린 학창 시절. 

아침이면 참새가 모여 노래와 세수하던 빗물이 담긴 항아리 뚜껑. 끊어졌던 필름이 연결되듯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린 정겨운 그 시절의 추억이 항아리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리운 가족의 얼굴이 있는 장독대. 그곳에는 고향이 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끈끈한 정과 가슴을 삭이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었다.  

오래된 낡은 물품이나 전통이라도 버리고 싶지 않은 유산이 있다. 헌 것은 무조건 고루하고 새로운 양식의 삶의 패턴은 무조건 고귀한 것은 아니다. 헌 것이라도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고 소중하게 남기고 싶은 유물이 있다. 

포도주와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은 것이고 유명한 예술가의 예술품과 소설과 시인의 글도 있다. 그 중에 하나, 우리 조상의 슬기와 지혜가 담긴 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옹기. 나와 함께 생활해온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움이 담긴 소중한 항아리 속에서 잊혀 가는 나의 뿌리를 찾고 싶다. 

벽난로에 추위를 녹이며 커피 한 잔에 지난날을 그려본다. 추억은 따뜻한 그리움을 그린 삶의 한 페이지이다. 나의 자취를 남긴 일기장과 같은 과거의 그림 속에 버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유산은 눈물겹도록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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