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1945년 7월 항해 기록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1945년 7월 항해 기록


스노호미시는 한가했다. 제멋대로 자란 풀이 너른 들로 한가득하였다. 그리고 가끔 스쳐 가는 몇 마리의 소들이 풍경을 더 나른하게 만들었다. 나름의 규칙을 가진 단순한 구성의 땅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거기엔 꽃밭도 있고, 알 수 없는 채소들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휘어진 등도 있고, 버려진 듯 검은 뼈만 앙상한 외양간도 있었다. 대도시에서 고작 20여 분 떨어진 거리에 이런 시골이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 시애틀 지역이 인구 증가로 교통이 복잡해지고 새로 짓는 아파트도 많아졌다지만 이곳은 예외인가 보다. 

오늘도 과거로 한번 가 봅시다. 동행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시간 여행의 시작을 알렸다. 그럽시다. 온 김에 애플파이도 좀 사고. 다른 동행의 목적은 맛집 투어에 있는 듯했다. 내 목적은 그들에게 있다. 그녀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게 좋아서 매번 그들을 따라나선다.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서둘러 나온 보람이 있다. 개점 시간을 맞춰 와야 번잡하지도 않고, 여유롭게 즐기다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 웰컴 투 앤틱 스테이션. 요란하지 않은 목소리로 점원이 인사했다. 날씨가 좀 더워서인지 가게 문을 받친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고, 점원은 금속으로 만든 무언가를 열심히 약을 뿌려 닦았다. 앤틱샵에서 하는 주 업무일지도 모를, 오래된 역사의 먼지를 닦고, 녹을 없애고, 고장 난 곳을 수리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 좀 봐요. 우리 집 거실에 달아두면 정말 예쁠 것 같지 않아요? 동행이 천장에 달린 전등갓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작지만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어서 불을 켠다면 거실을 분위기 있게 만들만한 소품이었다. 다른 동행도 그녀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전등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내 발은 삐걱대는 나무 바닥을 조심히 걸어 사라져 버린다. 

앤틱엔 유독 관심이 없다. 남이 쓰던 물건이라서가 아니다. 워낙 식구 많은 집에 살다 보니 이런저런 짐이 산더미 같이 쌓여 그것만도 숨이 턱 막히는데 다른 물건을 사다 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아주 작은 소품 하나도 그에 맞는 자리가 필요할 텐데 우리 집은 테마 없이 멋대로 꾸며진 전시관 같아서 갖다 놔 봤자 빛을 보지 못한 채 그야말로 ‘예쁜 쓰레기’가 되고 말 것이다. 살 생각이 없어서인지 내 걸음은 항상 둘보다 앞서갔다. 

부스마다 고유번호가 붙어 있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책을 많이 꽂아둔 곳도 있고, 액세사리가 많은 곳도 있고, 공구들이나 아이들 장난감이 많은 곳 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혹여나 뭐라도 하나 떨어져 깨지거나 망가질까 싶어 뒷짐을 지고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어쩌다가 호기심 나는 물건이 나타나면 조심스럽게 손을 대 보기도 했지만, 궁금증을 해결하고 나면 얼른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런 내 발걸음이 갑자기 한 곳에서 멈추어 섰다. 이건 뭐지? 가로로 기다란 세계 지도 액자였다. 옆에 사진도 몇 장 붙어 있고, 항로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그어져 있었다.  

앤틱샵을 둘러보다 보면 아시아 쪽 물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엔 그냥 이민자들이 가지고 왔다가 사후에 자식들이 내놓은 것이 아닐까 했는데 어쩌면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아시아 여행이 유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독 항로와 일치하는 중국, 베트남, 인도 물건이 많이 보이긴 했다. 

우린 세계 지도 옆 사진으로 눈을 모았다. 하나는 일본 구라시키에서 찍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기모노 복장을 한 여자 사진이었다. 또 다른 사진은 중국 취안저우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적혀 있었고, 중국 특유의 건물들이 늘어선 풍경을 찍은 것이었다. 

그때, 동행이 외쳤다. 우리나라도 찾아보자! 일본과 중국이 있으니 우리나라도 있을 터. 셋은 거북이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세계 지도를 향해 눈동자 여섯 개를 모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도 지도에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나라인데 그 안의 글씨는 더 작았다. 깨알 같은 글씨였다. 어린아이들의 눈으로도 읽기 어려울 만큼 작은 글씨. 어떻게든 읽어보려 눈을 찌뿌렸다 크게 뜨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눈알이 빠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결국 우리는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기로 했다.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처럼 혀끝까지 물고서 최대한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드디어 찍은 사진을 확대하니 그 글자들이 보였다. 우린 누구랄 것도 없이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조선, 코리아. 무려 조선 시대 지도였다. 우린 다시 사진을 확대해 글자를 읽었다. 현재 서울 위치에 적힌 글자. 게이조. 경성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우린 입을 다물었다. 일제강점기의 세계 지도였다. 미국 서부를 떠난 배는 일본의 여러 도시를 거치고 우리나라는 들르지 않은 채, 중국의 도시들과 베트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사이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났는지 성난 구름 그림과 함께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45년 7월. 해방 딱 한 달 전이었다.

이 배는 도대체 무슨 배일까, 여객선이 맞는 걸까, 뭔가 임무를 받고 움직이던 군함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이 액자의 주인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는 알았을까. 한 달 후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하고, 9일 후인 8월 15일엔 일본이 패전을 인정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또 그로 인해 조선이라는 한 나라가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게이조라는 도시는 서울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되리란 것도. 그런 생각들과 함께 우리의 77년짜리 시간 여행은 끝났다. 

바이, 컴 어게인. 요란하지 않은 목소리로 점원이 인사했다. 날씨가 좀 더워서인지 가게 문을 받친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고, 점원은 여전히 금속으로 만든 무언가를 열심히 약을 뿌려 닦았다. 

액자 속에 박제된 아주 작은 나라의 슬픈 시간. 그 위에 쌓인 먼지를 닦고, 녹을 없애고, 고장 난 곳을 수리하며 성장해 온 또다른 시간. 그 모든 시간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앤틱샵을 나왔다. 이제 애플파이 먹으러 갈까? 동행의 한 마디에 무거웠던 발걸음이 가볍게 땅에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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