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유세진] 아보카도 씨의 꿈
- 22-06-27
유세진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아보카도 씨의 꿈
갓 구운 식빵 위에 잘 익은 아보카도를 얇게 저며 두툼하게 올린다. 노른자가 덜 익은 계란 후라이를 그 위에 얹고 스리라차 소스를 쭈욱 뿌린다.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꺼내 봉긋한 곳을 톡 터뜨려 자르면, 주르르 노른자가 버터처럼 흘러내린다. 아보카도마저 입에서 사르르 녹으니 부드러움의 끝판왕이랄까. 여느 브런치 식당 못지않은 근사한 아침 메뉴, 아보카도 에그 토스트는 나의 최애 레시피다.
20여 년 전 미국에 방문했을 때 아보카도를 처음 맛봤다. 달지도 않은 게 과일이라니 참 낯설었다. 그런데 어라, 먹으면 먹을수록 고소한 맛에 빠져들었다. 여러 채소를 곁들어 김에 직접 싸 먹는 일명 LA 김밥에는 아보카도가 들어가야 제맛이다. 와사비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난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숲 속의 버터를 찾아 백화점 식품 코너를 헤맸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희귀한 식재료라 가격이 만만치 않아 선뜻 살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아보카도가 제법 인기인가 보다. 슈퍼푸드 대접을 받으며 건강 뿐만 아니라 멋스러운 요리에 단골 재료로, 음식 뿐만 아니라 화장품 원료로도 주목받는다. 몇 년 전 한국 방문 중에, 전 세계에서 제주도 스타벅스에서만 판다는 아보카도 스무디를 맛보며 언제부터 아보카도가 이렇게 흔해졌나 격세지감을 느꼈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던 집에는 마당 한가운데 아름드리 아보카도 나무가 있었다. 매년 이삼백 개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우리도 다람쥐도 실컷, 아니 헤프게 먹었다. 막 딴 아보카도는 껍질이 얇고 신선했다. 말랑말랑 익었을 때 숟가락으로 살살 긁으면 돌배기 아들의 이유식으로 딱이었다. 게다가 널찍하게 떡 벌어진 이파리는 윤기가 좌르르 흘러 뒷마당의 운치를 더했다. 굵은 가지에 그네를 매달고 좋아하던 꼬마 아가씨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시애틀로 이사 와서는 아보카도 나무는커녕 그렇게 흔하디 흔한 오렌지, 레몬 나무도 동네에서 통 볼 수가 없다. 대신 딸기 덤불들이 지천이고 요것도 따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발아시킨 아보카도 씨를 집으로 가져왔다. 이쑤시개 세 개가 꽂혀 있는 씨가 물이 가득 담긴 컵에 걸쳐 있었다. 두꺼운 씨를 뚫고 싹과 뿌리가 나와 있는 게 신기했다. 며칠 안 가서 줄기가 쑥 솟고 파란 새싹이 펼쳐지길래 서둘러 마당에 옮겨 심었다. 블루베리 나무 옆에 아보카도 나무라, 상상만 해도 모든 걸 다 가진 듯 행복했다. 하지만 구름과 비, 추위는 이곳의 일상이었고 결국 가녀린 아보카도 모종은 얼어 죽고 말았다.
그 이후로 아보카도를 먹을 때마다 매끄럽고 탐스러운 씨를 쉽게 버리지 못했다. 다시 발아시켜 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단념했다. 그런데 친정 엄마가 인터넷을 보고 따라 했다며 아보카도 씨를 거실 천장까지 닿는 관엽수로 키워낸 사진을 보냈다. 한국 아파트 환경에서도 자랐다면 여기서 못 자랄 리 없다. 얼른 투명한 컵을 싱크대 앞에 두고 씨를 물에 반쯤 담갔다. 설거지할 때마다 언제 싹이 나올까 유심히 살폈다. 한 달이 지나서야 표면에 금이 가고, 두 달째 씨가 깨졌다. 마침내 석 달이 돼서야 싹이 트고 여린 뿌리가 내려왔다. 참으로 더딘 과정이었다.
100일의 인내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기 아보카도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했다. 보랏빛 줄기는 하늘을 향해 쭉 뻗었고, 반질반질한 잎을 하나 둘씩 우아하게 펼쳤다. 뿌리가 돌돌 말리며 굵어질수록, 씨를 담은 유리컵은 점점 버거워 보였다. 흙으로 옮겨야 하는데… 생각뿐,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적댔다. 혹시라도 섣부른 이별을 또 맞게 될까 봐 주저하는 사이, 아보카도 모종은 묘목이 되었다.
텃밭에 채소 모종도 다 내다 심었는데 여전히 유리컵 신세인 아보카도가 눈에 밟혔다. 더 이상 미루기 미안해서 화분에 흙을 담고 옮겨 심었다. 오랜만에 좋은 해도 실컷 쬐라고 텃밭 곁에 내다 놓았다. 며칠 날씨가 좋길래 크게 걱정 안 했다. 그런데 물 주러 나갔다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 윤기 흐르던 이파리가 옅은 갈색으로 타들어 갔다. 부랴부랴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와 물을 듬뿍 줘 봤지만 소용없었다. 때늦은 심폐소생술은 쪼그라든 잎사귀를 결국 펴내지 못했다. 이파리만큼 내 가슴도 까맣게 탔다. 흙이란 새로운 환경과 유리창 밖의 자연광이 낯설고 버거웠을 작은 나무가 불쌍했다.
죽어가는 나무를 붙들고 있으면 뭐 하겠냐고 흙이라도 재활용하자고 남편은 아보카도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내 손으로는 도저히 내다 버릴 수 없었던 터다. 또다시 맞은 이별. 오래 곁에 두었던 거라 싱크대 앞 빈자리가 휑하다. 허전한 맘을 달래려 인터넷을 뒤졌다. 이번엔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게 원인이다. 뿌리가 내리고 바로 흙으로 옮겨야 했다. 어린뿌리가 일찌감치 흙에서 에너지를 얻는 법을 훈련받아야 했는데 너무 오래 편안한 물에서 쉽게 키웠다. 세상이 험난하다고 줄곧 끼고 있던 내 사랑이 아보카도 씨가 나무가 되는 꿈을 막고 말았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잦은 헤어짐은 면역력을 키웠다. 망설임 없이 다시 아보카도 씨를 물에 담근다. 넘어지는 경험도 꿈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이겠지. 앞으로 몇 번의 이별을 감내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아보카도 씨가 나무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꿈꿔 보련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미국서 국내선 3시간, 국제선 6시간 지연되면 자동 환불
- 한국 연예인 홍진경, 이번 주 김치홍보차 시애틀 H-마트온다
- [부고] 강화남 전 워싱턴주 밴쿠버한인회장 별세
- 한국, 40세부터 복수국적 허용 추진
- 한국학교 서북미협의회 개최 학력어휘경시대회서 5명 만점 받아
- 재미한인장학기금 올해 장학생 총 80명으로 확대
- <속보>부인 생매장하려했던 워싱턴주 한인 징역 13년 선고돼(영상)
- KAC, 한인서비스날 맞아 대전정 청소했다
- [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김철훈 목사 소고(小考-1)
- [서북미 좋은 시-오인정] 복수초
- 한국 아이돌그룹, 시애틀 매리너스 경기장서 시구한다
- ‘인기짱’시애틀영사관 국적ㆍ병역설명회 개최…“선착순 접수”
- 시애틀과 대전 자매결연 35년 교류확대 추진한다
- “킹카운티 도서관 공청회에 참석하세요”
- 전북자치도, 시애틀 경제사절단 대상 투자 설명
- [하이킹 정보] 시애틀산우회 20일 토요정기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0일 토요산행
- 한인운영 더블트리 호텔서 경찰총격 1명 사망
- 영오션 시애틀 한인들에게 한국산김치 판매 시작
- 시애틀, 벨뷰, 부산시장이 만났다
- 워싱턴주 체육회 기금마련 골프대회
시애틀 뉴스
- 시애틀지역 운전자 테슬라 자율주행으로 운전하다 사망사고
- <속보> 한인운영 더블트리 호텔 총격 사망자는 해군 의사 출신(영상) -
- 머클슛 카지노서 '이유없이' 칼로 찔러 살해
- 워싱턴주 주민들 도박 중독 얼마나 빠져있을까?
- 워싱턴주내 늑대 크게 늘어났다
- 워싱턴주지사 후보 세미 버드, 공화당 공식 지지따냈지만
- 골드만삭스 "소비자 지출 호조…아마존주식 '매수'를"
- 시애틀 비지니스 시작하기에 얼마나 좋을까?
- 나이키 비용절감 위해 오리건 비버튼 본사직원 740명 해고
- 타코마 할머니 106살 생일잔치...장수비결 물어보니?
- 벨뷰 경전철 이번 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운항시작
- 시애틀시 24개 ‘마을센터’ 조성추진 여론 수렴한다
- 워싱턴주 다용량 탄창 금지법 계속 유효할까?
뉴스포커스
- '장밋빛' 물든 성장률 전망…전문가들 "유가·수출·환율이 관건"
- '의대교수 집단사직·주1회 셧다운' 예고…"최악의 5월이 온다"
- "오른다" "내린다" 엇갈리는 지표…'집 살까요 말까요' 시장은 혼란
- 홍준표 "또 끈 떨어진 외국감독 데려온다고 부산 떨어"…축협 비판
- "조국에 1000만원 배상"…'MB·박근혜 국정원 불법사찰' 첫 대법 판단
- "화제성 미쳤다"…민희진 울분 쏟아낸 기자회견 티셔츠 '완판'
- 고국에 비수 꽂은 신태용 감독 "행복하지만 처참하고 힘들어"
- 형님도 아우도 '도하 참사'…아시아 '고양이'로 전락한 한국축구의 민낯
- "시XXX" "개저씨" 뉴진스 엄마의 거친 입…하이브는 '민희진 고발장' 냈다
- '패륜 가족' 상속권 박탈…국민 상식 통했다
- 박정희 동상 건립 논란에 홍준표 "정치적 이유로 반대 옳지 않아"
- 테이저건 맞고 사망?…안전성 논란에도 현장선 필수인 이유
- "마늘 더 달라고요?" 식당들 울상…수입산도 1년새 50% 급등
- 티빙, 이용자 역대 최대 경신…넷플과는 역대 최소 격차 기록도
- 국민연금 소득보장안 논란 지속…IMF "보험료율 20% 이상으로"
- "웃기는 일 하고싶다"던 김제동, 27일 文 평산책방 행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