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앞마당' 중남미 '좌파 물결'…대미관계 변화는?

중남미 '핑크타이드 시즌2'는 '진보 물결'…색깔론 아닌 가치의 승리

美, 콜롬비아 등 잇단 정권교체 주목…기후변화·인권·평등 가치외교 수렴 여지 커

 

남아메리카 대륙 북단에 위치, 중미와 남미 가운데에 놓인 콜롬비아는 지난 100여년간 역내 충실한 친미(親美) 국가로 인식돼왔다. 

그런 콜롬비아에서 지난 19일 대선 결과 두터운 우파 기득권에 한평생 맞서온 좌익 게릴라 출신 페트로 구스타보(62) 당선인이 승리한 건 역사적인 일로 평가받는다. 

중남미의 또 다른 대표 친미 국가 멕시코에 2018년 좌파 정부가 출범한 데 이어 2019년 아르헨티나, 2020년 볼리비아 그리고 지난해 페루, 칠레, 온두라스에서 좌파가 영향력을 회복해온 터다.  

이 같은 변화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주시하는 나라는 단연 중남미를 '앞마당'으로 여겨온 미국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튿날 분석 기사를 통해 변화의 배경과 양상을 집중 조명했다.

무엇이 변화를 이끌었을까.

◇'공산주의 괴물 온다' 레토릭 이제 안 통해

알베르토 베르가라 페루 태평양대 교수는 "선거 때마다 우파는 늘 사람들에게 (좌파를 찍으면) '공산주의 괴물이 온다'는 생각을 주입해 겁주려 했다"며 "선거를 거듭하면서 이제 (그런 시도는) 힘을 잃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코로나19 팬데믹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WP는 짚었다. 중남미는 높은 치사율로 팬데믹 여파를 세게 입은 지역인데, 특히 콜롬비아는 경제적으로도 1년 만에 1200만 명이 중산층에서 밀려나는 충격을 겪었다.  

가난과 비참함에 지친 청년과 서민, 대다수 콜롬비아 국민은 '이번만큼은 뭔가 다른 사람'을 갈망했고, 그 결과 이번 대선 1차 투표에서는 사상 최초로 우파 기득권 대표로 출마한 후보가 결선에 오르지 못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수십 년 내전을 겪은 콜롬비아에서 게릴라 출신 좌익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면 으레 소리소문없이 암살당한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은 것도 이변이다.

콜롬비아 뿐만이 아니다. 페루에서는 지난해 시골교사 출신인 급진좌파 성향의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이 집권했다. 한국의 최초 자유무역협정(FTA) 상대국인 자유시장 칠레에서도 학생운동가 출신의 36세 좌파 청년 가브리엘 보리치가 권력을 잡았다.

중남미 최북단 멕시코에선 2018년 사상 첫 좌파 대통령에 오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정부가 건재하고, 최남단 아르헨티나도 2019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당선으로 4년 만에 좌파가 복귀했다. 

이제 세계의 이목은 오는 10월 브라질 대선에 쏠리는데, 2000년대 초반 중남미 '핑크타이드(좌파 물결)'를 이끌었던 금속노동자 출신 실용좌파 정치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의 복귀를 예고하고 있다. 

바야흐로 '돌아온 핑크타이드'다. 그러나 WP는 중남미에 불어온 두 번째 좌파 물결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페트로나 보리치 등 새 좌파 수장들의 모습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오일머니 대신 교육·산업재편…억압 아닌 인권 중시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작년 12월 당선 직후 수락 연설 가장 서두에서 여성운동가들을 향해 "자신의 몸에 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싸워준 여성 운동가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성소수자들을 향해 "새 정부에선 여러분이 주인공이다. 비(非)차별이 국정운영의 근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새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서는 "성장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는 "민주주의를 보살피는 대통령이 되겠다. 말보다 경청을 더 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소수의 특권을 타파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페트로 콜롬비아 당선인은 이번 선거 기간 "전쟁이 아닌 교육을, 석유와 코카인이 아닌 노동과 산업 변혁을, 국가를 지배하는 소수 지배체제가 아닌 다인종 민주주의를 이룩하겠다"고 공약했다.  

WP는 이처럼 중남미 신(新) 좌파 수장들이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혁명의 근간인 석유 기반 경제 건설 대신, 기후변화 대응과 여성, 성소수자(LGBTQ), 아프리카 원주민 공동체 권리 보호 등을 약속해 권력을 얻음으로써 이전 좌파 시대의 '마치즘(남성우월주의)'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왔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가치 중심의 공약이 2019년 칠레, 2020년 콜롬비아 등 최근 몇 년간 불평등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두 번째 핑크타이드를 이끌고 있는 신 중남미 좌파 수장들 중 '카리스마형 리더'는 많지 않다. 

또한 가톨릭 국가인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 낙태를, 콜롬비아는 안락사를, 칠레는 동성결혼을 이미 합법화하거나 추진 중인 최근 몇 년의 움직임을 보면 지금의 변화는 아래로부터 내지는 사회와 함께 가고 있다고 보는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가치외교로 똘똘 뭉치는 중남미 신 좌파 수장들…대미 관계 변화는?

WP는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당선인이 올초 인터뷰에서 "(당선시) 칠레, 브라질과의 점진적인 동맹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한 점에 집중했다. 이 같은 규합은 중남미에서 미국을 가장자리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달 초 미국이 의장국 순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한 미주정상회의에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3국 정상을 부르지 않자, 멕시코 대통령을 필두로 온두라스와 볼리비아 등 여러 나라 정상이 불참해 '반쪽 회의'를 만든 점도 상징적이다.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회의에 참석했지만, WP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적대국(반미국)과의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중남미 민주주의 목표를 발전시킬 기회를 되레 놓친 것"이라고 비판했다.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당선인은 수락 연설에서 "모든 아메리카에서의 배제 없는 대화"를 촉구, 비슷한 메시지를 보냈다. 페트로 당선인이 정식으로 취임하면 옆나라 베네수엘라와의 대대적인 관계 개선이 예상된다.  

그는 또 지난 수십 년간 해온 '마약과의 전쟁'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농산물 대체 등을 주장해왔다. 마약과의 전쟁 정책에는 미국이 수년간 원조해온 수십억 달러가 투입됐는데, 정책 선회를 예고하는 것이다. 아울러 페트로 당선인은 미국과의 범죄인인도조약과 무역협정도 일부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미국에서는 앞마당에서 물러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워싱턴 윌슨센터의 중남미 프로그램 책임자 신시아 앤슨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이란, 북한에 여념 없는 사이 중남미에서의 영향력이 계속 감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지 W. 부시와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 국무부 중남미(서반구) 담당 차관보를 지낸 버나드 아론슨은 현재를 "중남미가 주도권을 잡는 시점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며 "미국은 점점 대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중남미 워싱턴사무소의 애덤 아이작슨은 "미국은 오랜 기간 중남미와의 협력을 러시아·중국과의 경쟁의 렌즈로 바라봐왔는데, 중남미에서의 강대국간 경쟁을 '냉전 2.0'의 시각으로 본다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후변화 대응 등 차기 좌파 정부와 일치하는 포인트 많아" 

좌파물결보다는 진보물결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가치 중심 변화가 두드러지는 중남미의 두 번째 핑크타이드 시기 대미관계 역시 색깔론으로 구분지어선 안 된다는 관측도 나온다. 

브라이언 니콜스 미 국무부 중남미 담당 차관보는 지난 20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는 콜롬비아에 출범할 좌파 정부와 기후변화 대응 등 의견일치를 이룰 포인트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페트로 당선인은 수락연설 중 외교정책의 우선순위로 기후변화 대응을 강조했다. 그는 "가장 큰 스펀지 중 하나인 라틴아메리카 아마존 열대우림에 흡수되는 온실가스 배출 문제를 미국과 논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아론스 전 차관보는 "미국은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 브라질 룰라 전 대통령 등 남미 좌파 정상들과 성공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며 "콜롬비아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과 지속적으로 정파를 뛰어넘는 관계를 유지해온 만큼, 페트로가 현명하다면 그 역시 그 관계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중남미에 돌아온 핑크타이드 성공의 관건은 이들 정상이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WP는 이전의 많은 포퓰리즘 대통령들처럼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당선인에게 역시 서민들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라고 짚었다.

보고타 서민 동네에서 2살 난 딸을 키우고 사는 22세 학생 에리카 안드레아 우녜스는 스스로 페트로 지지자는 아니라면서도 "그가 청년들을 위해 하겠다고 한 것, 특히 무료 보편 고등교육 제안 때문에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정말 그것을 이룰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길 바란다"는 기대를 전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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