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젊은 비밀들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젊은 비밀들


현재의 기억에서 젖내가 난다. 첫 숨을 내쉬던 때로 돌아갈수록 점점 나이가 든다. 기억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그러니까 지금 글 쓰는 나는 이제 막 태어났고, 엄마를 잃어 소방서 앞에서 울고 있던 나는 벌써 마흔 살이나 먹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나이 든 기억은 하나 둘씩 지워진다. 사라진다. 죽어간다.

개중에는 죽지 않고 살아 새로운 기억에 무임 승차하는 녀석도 있다. 비슷한 옷을 입은 녀석을 만났을 때다. 둘은 마치 비밀을 나눈 사이처럼 가깝게 붙어 앉아 공통점을 찾는다. 공통점 하나를 찾을 때마다 기뻐 손뼉을 친다. 맞아, 맞아 하면서.

너 그거 기억나니? 친구의 이야기는 꼭 그렇게 시작한다. 난 네가 여성운동가가 될 줄 알았어. 맞아, 맞아. 그랬지. 그런데 네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할 줄 누가 알았겠니, 남자랑 결혼도 안 할 것 같았는데. 맞아, 맞아. 그랬지. 스무 살 먹은 기억이 카톡 창을 타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느라 바쁘다.

그때의 나는 차가운 불 같았다. 여자들은 다 저런 거 좋아하지 않나? 백화점에 진열된 예쁜 그릇을 보며 남편이 건넨 한마디에 감정이 크게 폭발했다. 여자들은 다 저런 거 좋아해야 한다는 법 있어? 남편은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표정을 지으며 당황해했다. 꽤 오랫동안 비슷한 기억에 무임 승차하며 덩치를 키워온 녀석 탓이다.

날 닮아 꾸미는 걸 영 못하는 첫째 딸에게 남편이 말했다. 요즘 여자애들은 중학교 가면 다 화장하고 그러지 않나? 너도 좀 예쁘게 꾸미고 다녀. 스물여덟 살 먹은 기억이 무임 승차한다. 여자는 다 그러라는 법 있어요? 아이의 눈빛이 낯익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에게서 내 나이 든 기억이 되살아난다.

지워질 만하면 다시 살아나는 녀석. 그 녀석을 자극한 건 주변 사람들, 가부장적 사회와 그것을 당연시하는 문화였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 기억을 공유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우리들은 겨우겨우 키를 키워가던 한국 여성 인권과 함께 자랐다. 부모에게선 아들, 딸 구별 없이 평등하게 대우받았고, 대학 공부까지 마쳐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됐다. 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몇 백 년을 이어온 사람들의 습관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배경을 깔고 있었다. 아팠다. 몸이 자라면 어릴 적 흉터도 커진다는 걸 잊고 있었다.

수술용 스테인리스 침대에 누워 죽음의 통로처럼 밝혀지는 라이트를 바라보는 심정. 그저 따뜻할 줄 알았던 기억의 비밀을 밝히는 순간, 온몸에 차가운 요철이 느껴졌다. 항상 ‘어떻게’를 넘어 ‘무엇을’까지 가야 했다. ‘어떻게’는 길만 제시할 뿐, 행동을 수반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무엇을’이란 질문을 던져야 했다.

누군가 말했다. 그 정도 했음 됐어. 그만 좀 해. 난 대답했다. 여자로 살아보지 않았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크게 됐을 텐데, 라는 말조차 칭찬이 되지 못하는 이상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있냐고. 열정에 이성을, 감정에 논리를 붙여 대변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 끝에 군소리를 달았다.

노르웨이는 1913년, 영국은 1918년, 미국은 1920년, 한국은 1948년,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에 여성 참정권이 헌법으로 통과됐다. 서양 국가에서도 100여 년밖에 안 됐고, 한국은 고작 74년의 역사를 갖는다. 현재 전 세계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바티칸 시국, 단 한 곳뿐이다.

미용실에 들어선 둘째 딸이 물었다. 엄마, 나 아주 짧게 커트 쳐도 돼? 이번엔 스물다섯 살 먹은 기억이 무임 승차한다. 아버지는 짧게 친 내 머리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집엔 아들이 하나뿐이다. 다음부턴 그렇게 짧게 자르지 마라. 지금 내 앞에서 막 만들어지고 있는 기억의 시간. 아이가 걱정과 호기심이 반씩 섞인 표정을 하고서 내 반응을 기다렸다. 난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짧게 커트 말고, 멋진 삭발은 어때?? 요즘 반삭도 유행이라는데 그것도 좋지. 그날, 아이는 내 대답에 되레 황당해하면서도 목선까지 짧게 친 헤어 스타일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젖내 나는 기억 앞에서 젊은 비밀들이 탄생한다. 헌법으로 규정해도 사회와 문화라는 배경을 지우기엔 여전히 ‘어떻게’를 넘어 ‘무엇을’까지 계속 전진해야 한다. 하지만 훗날 누군가는 기억해 줄 나이 든 기억의 비밀들이 쌓이고, 전 세계 여자들이 사람 취급이 아닌 사람대접 받으며 아픈 기억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중에 죽지 않고 살아 새로운 기억에 자꾸 무임 승차하길 바란다. 맞아, 맞아 하며 손뼉을 치기를, 비슷한 옷을 입은 녀석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내 미래를 살아가는 딸들을 보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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