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회백] APPOMATTOX , 미국 판문점

이회백 의사(머서 아일랜드 거주)

 

APPOMATTOX , 미국 판문점

 

1865년 3월4일

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이날 그의 두번째 취임사에서 이같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악감정 없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심을"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

 

1865년 3월 28일

그랜트 장군의 수상 지휘소(Floating Commanding Post)인 유니온 증기선 River Queen에서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 중장, 셔먼 소장, 그리고 포터 해군 소장과 만난 자리에서 “반군이 무기를 놓고 집에 돌아가면 우리는 그들을 다시 미국 시민으로 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1861년에 링컨을 처음으로 만나본 셔먼 장군은 그를 연약하고 당파적이고 대통령 노릇을 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두번째로 그를 만나본 후로는 ”그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중 훌륭한 사람이 갖추어야할 모든 요소와 인간성을 가장 많이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가 달라졌다.

미조리 주 하원의원을 지낸 제임스 사이밍턴(James Symington)은 ”링컨은 양쪽을 다 보는 통찰력을 가졌기에 그는 남북전쟁(시민전쟁)중 중추적인 역할을 할수 있었다.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 친구로 지내야 함을 항상 명심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1865년 4월 9일

이틀 전에 그랜트 장군으로부터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받은 로버트 리 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길을 찾았으나 그 길이 없음이 분명해지자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의논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이때 그랜트 장군은 심한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 편지를 받자마자 두통이 사라졌다. 그는 아무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단지 부하에게 크게 읽으라고 했다. 그는 즉시 로버트 리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읽어본 로버트 리 장군은 예상치 못한 회답에 놀랐다. 회담장소를 패한 자기에게 정하라는 것이다. 그는 즉시 적당한 회담장소를 물색하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때 그가 포위당한 장소는 당시 남부 동맹국(Confederate) 수도였던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남쪽에 위치한 피터스버그(Petersburg)와 그 서쪽에 위치한 린치버그(Lynchburg) 사이에 있는 Appomattox Court House 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스무개 정도의 집이 있는 마을이었는데 처음에 고려한 집은 너무 허술해 다시 물색한 결과 윌머 맥클린(Wilmer McLean)이란 사람의 집(사진)이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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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못해 승낙한 이집 주인, 윌머 맥클린이란 사람은 원래 남북전쟁 첫번째 전투지였던 매나사스(Manassas) 근처에 살던 사람인데 전쟁 한복판을 피해 한적한 곳에서 살자고 이곳으로 이사해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매나사스 집은 남북전쟁의 첫 신호탄이 된 Fort Sumter 포격시 그곳 사령관이었던 P.G.T. Beauregard 준장이 매나사스전투(북측에서는 제1차 Bull Run이라 부른다)때 본부로 쓴 집이었다. 

따라서 윌머 맥크린의 두 집은 남북전쟁이 시작되고 끝마치는 기구한 운명의 집이 되었고 지금 아포마톡스에 있는 집은 아포마톡스 Court House 국립 역사공원으로 지정되면서 2008년에 재건한 집이다. 나도 한번 가서 구경하고 싶은 그런 집이다.

로버트 리 장군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쑥한 새 군복을 입었고 조각 무늬가 새겨진 칼을 옆에 차고 있었다. 그는 포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차림을 적에게 허술하게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정장한 것이었다.

30분 후에 나타난 그랜트 장군의 차림은 이와 대조적으로 작전지역에서 입던 옷 그대로 달려와서 구겨진 옷에 진흙이 얼룩져 있었다. 아무 무기도 소지하지 않은 그는 어께에 달린 퇴색된 계급장만이 간신히 그가 장군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사이가 없어 무례하게 됐노라고 사과했다. 

한 쪽은 패한 장군, 한 쪽은 승전한 장군인데도 표정은 똑같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랜트 장군이 먼저 자기가 멕시코 전쟁때 그를 본 기억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로버트 리 장군은 “그랬던가” 하면서 자기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노라고 대답했다. 이런 사적인 이야기가 오고가다가 로버트 리 장군이 먼저 사무적인 논제를 끄집어냈다. 

항복조건으로 무엇을 자기에게 요구하는가 하고 물었다. 첫째 장병 전원의 명단을 두벌 작성, 하나는 자기 편에, 다른 하나는 상대편이 보관할것, 둘째 다시는 연방 정부에게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선서를 할 것, 셋째 모든 무기와 장비는 지정한 장소에 옮기고 우리가 임명한 장교에게 바칠것, 그러나 장교의 개인용 무기와 말, 그리고 개인 휴대물은 이에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이를 이행한 후에는 언제 귀가해도 되고 이 요구조건을 지키고 지나가는 지방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아무도 연방 정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집에 갈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로버트 리가 예상했던 조건보다 훨씬 관대한 것이었다. 아무도 포로로 가두거나 반란죄로 기소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또 이제 우리는  어차피 소용없고 당신들 사병들은 돌아가면 다가오는 봄 경작에 필요할테니 말도 가져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랜트 장군은 로버트 리 장군에게 지금 휘하에 몇명이 있으며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로버트 리 장군은 지금 몇명이나 남아있는 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굶주리고  있는 것은 알고 있노라고 했다. 그랜트 장군이 2만 5,000명분 휴대 식량을 보내겠다고 하자 로버트 리 장군은 그것은 자기 사병들을 매우 즐겁게 해줄 것이며 앞으로 남북이 화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회담 내용을 기록하고 내용을 피차 확인하고 나니  오후 4시가 지났다.

항복문서에 서명을 마친 로버트 리 장군이 회담장소에서 나와 말에 올라 자기 진지로  향하자 둘러쌌던 북부군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랜트 장군은 이를 즉각 중지시키고 “그들은 이제 우리들의 포로다. 그들의 패배를 우리가 즐길 때가 아니다. 전쟁은 끝났다. 그들은 다시 우리 국민이 되었다” 고 조용히 말해 군인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다음날 정식 조인식을 갖고 사열식을 갖게 되었다. 북부 조슈아 챔벌린(Joshua L. Chamberlain) 장군이 이 역을 맡게 되었다. 그는 게티스버그, 피터스버그 전투에서 여섯 군데나 다쳐 그가 살아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치 못한 그런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장군이다. 

남부군 존 고든 (John B. Gordon) 장군이 그의 앞을 지나가고 그의 뒤를 따라 북 버지니아군의 유명한 스톤월 여단이 지나가자  챔벌린 장군은 패해서 가는 그들을 향해 경례를 하라고 자기 군병에게 명령했다. 이에 답례해 고든 장군은 말을 돌려 챔벌린 장군을 향해 그의 칼끝을 그의 발끝에 갖다 대면서 답례를 했다. 후에 고든 장군은 챔벌린 장군을 최고의 기사도를 갖춘 장군이라고 극찬했다.

로버트 리 장군은 항복 당시 그란트 장군이 베푼 관용을 평생 잊지 않고 자기 앞에서 그랜트 장군에게 불친절하게 말을 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았다.

이렇게 해서 처음엔 90일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남북전쟁은 4년이 걸리고 62만명의 인명 피해를 낸후 아포마톡스에서 '사실상' 끝났다. 이는 미국이 치른 독립전쟁, 1812년 영국과의 전쟁, 멕시코 전쟁, 스페인 전쟁,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합친 숫자보다 많은 숫자다. 그 당시 미국 인구가 3,100만명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620만명의 인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쟁이었다. (최근에는 75만명으로 수정되었다.)

로버트 리 장군이 지휘하는 북 버지니아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다른 반군도 차례로 항복했다. 그 중 가장 큰 군대는 북 캐롤라이나에서 셔먼 장군과 대적하고 있던 조셉 존스턴(Joseph E. Johnston)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였는데 그도 4월 24일에  항복했다. 셔먼 장군은 현대전에서 초토화 전술을 쓴 최초의 장군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전술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잔인한 거다.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전쟁은 빨리 끝난다.” 그의 초토화 전술이 효과를 나타내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전쟁은 급속히 막을 내리게 되고 그 결과 링컨조차 질 것으로 예상했던 대통령선거는 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링컨이 재선되지 않았다면 오늘 날의 미국은 거의 틀림없이 두개 또는 그 이상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잔인한 전술을 썼던 셔먼 장군도 존스튼이 항복하자 그랜트에 못지않은 관용을 베풀었다.

셔먼 장군은 전후 전혀 정치에 관여치 않고 끝까지 군인으로 남아있다가 은퇴했다. 은퇴후 그는 존스튼과 자주 만났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셔먼이 1891년 2월 14일에 7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식 날은  비가 내리고 몹시 추운날이었다.모자를 벗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존스튼 장군의 건강을 염려한 주위 사람들이  “장군님,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모자를 쓰시지요.” ㄹ고 하자  “오늘 내 대신 그가 이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그도 모자를 벗었을 것이오”라고 응하지 않았다. 그날 든 감기로 인해 폐렴이 되면서 35일 후에 그도 그의 친구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1865년 4월 14일

이날은 성 금요일(Good Friday), Fort Sumter에선 국기 게양식이 거행되고 대통령 명령으로 전국에서 축포가 터진 기쁜 날이었다. 4년 전 이날에 내렸던 바로 그 국기가 그때 그 국기를 내렸던 로버트 앤더슨 소령에 의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환호 속에 게양 되었다. 그러나 가장 기뻤던 이날은 그날 저녁에 가장 슬픈 날이 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포드 극장에서 '우리 아메리칸 사촌'이라는 희극을 관람도중 존 윌키스 부스(John Wilkes Booth)가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탄은 목을 뚫고 으론쪽 눈에 박혀 회복불가능이란 의사의 진단으로 아무 손도 못쓰고 다음날 아침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제 2차 취임식을 가진지 채 43일도 안된 날이었다. 부통령인 앤드루 존슨도 다른 암살범에 의해 살해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암살범이 겁을 먹은 덕에 살해를 면했고 국무장관이던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는 그의 아들과 함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으나 살아났다. 스워드는 링컨에 이어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의 국무장관으로 유임하면서 2년후(1867년 3월 30일) 알래스카를 러시아로 부터 720만달러(acre 당 2전)을 주고 사는데 주역을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땅을 비싸게 산 스워드의 바보짓(Seward’s folly), 스워드의 냉장고라고 놀림을 받았던 사람이다.

 

1865년 4월 26일

암살범 존 윌키스 부스가 수색대원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는 백인우월주의 신봉자로서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로버트 리가 항복한 후에도 그는 자기가 링컨을 제거하면 아직 항복하지 않고 남아있는 남군이 궐기, 승리하리라고 믿고 암살헸다. 그러나 링컨이 죽은 열흘 후에 존스튼의 군대도 항복함으로써 그의 꿈은 사라졌다. 그는 “Useless, Useless” 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865년 4월 21일~5월 3일

아브라함 링컨의 영구열차는 그가 4년 전 스프링필드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했던 길과 반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필라델피아서는 독립관에 영구가 안치되었다. 이곳은 4년 전에 암살 당할 것을 예상이나 한듯  “….. but if this country cannot be saved without giving up that principle, I was about to say I would rather be assassinated on this spot than surrender it.” 라고 말한 바로 그 장소를 지나 1,654마일의 거리를 열이틀이 걸려 스프링필드에 도착했다. 

“갈라진 집은 자기 힘으로는 설 수 없다(A House divided in itself cannot stand)”라고 1858년 6월 16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때 연설한 바로 그곳에 돌아왔다. 그 자신은 쓰러졌으나 집은 바로 세우고 돌아왔다. 아홉살때 죽은 링컨의 어머니를 대신해 링컨을 링컨으로 키운 계모 새라(Sarah)는 링컨이 워싱턴을 향해 떠날 때 가졌던 예감, 다시는 살아있는 그를  못보리라는, 이  현실로 나타나자 흐느껴 울었다.

 

1865년 11월 10일

앤더슨빌(Andersonville) 포로수용소장 헨리 월즈(Henry Wirz)가 인류에게 저지른 잔학행위의 죄명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캠프 섬터(Camp Sumter)로 불렸던 이 악명높은 포로수용소에서 죽은 북부군 포로들의 수는 후에 미국 적십자 창시자가 되고 남북전쟁터의 천사로 불리는 크랄라 바튼(Clara Barton) 의 조사결과 1만 2,912명으로 집계됐다. 

헬리 월즈는 교수대에서 “나는 명령에 따랐을뿐” 이라고 항변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애틀랜타에서 사반나로 진격하든 도중에 앤더슨빌 포로수용소를 지나가다가 병들어 신음하고 입은 상처엔 구더기가 끓고 굶주려 피골이 상접해 산 송장이 된 전우들을 본 셔먼 군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1913년 6월1일~3일

50년전, 1863년 6월 1일과 3일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양쪽 합해 4만 6,000명의 사망자를 를 낸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펜실바니아주 게티스버그에 모여 사흘을 지나며 옛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부는 회색, 북부는 푸른 전투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군모를 쓰고 나와 싸웠던 전지를 가리키며 옛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장에서 그런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과거는 항상 즐거운법, 팔을 잃고 다리를 짤린 그들도 남의 일인듯 웃으며 이야기 했다. 묘지 언덕(Cemetery Hill)을 향해 남부군이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했다. 위에 있는 돌담에서 이를 지켜보든 북부군은 감정이 솟구쳐 더 기다리지 못하고 담을 뛰어넘어 남군을 향해 구르듯이 내려왔다. 그리고는 서로 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1914년 2월 24일

게티스버그의 영웅, 그리고 아포마톡스에서 로버트 리 장군의 북 버지니아 군의 정식 항복식 사열을 받았던 챔벌린 장군이 사망했다. 그는 원래 메인 주에 있는 보우도인(Bowdoin) 대학의 교수였고 군대훈련을 받은 바가 없는 지원병이었다. 그는 수학과 과학을 빼놓고는 전과목을 가르쳤으며 영어 외에  9개국어(희랍어, 스페인어, 불란서어, 독일어, 라틴어, 이태리어,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Syriac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탁월한 교수였다. 전후 그는 다시 메인에 돌아가 4년간 주지사로 지낸 후엔 다시 그의 모교 보우도인 대학에서 1871년 부터 1883년까지 총장으로 일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퇴임, 1914년 2월 24일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총장으로 있으면서도 그는 수학 외에는 전과목을 강의했다고 전한다. 그의 죽음은 남북전쟁때 받은 상처때문이라고 판정되어 그는 미 남북전쟁때 전사한 최후의 군인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은 날이 진짜 남북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1938년 6월1일~3일

게티스버그 전투 75주년 기념식에 당시 싸웠던 남북 군인이 다시 모였다. 90살이 다 넘었고 100을 바라보는 노인들이 묘지 언덕 돌담을 사이에 두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는 크게 웃으며 식을 마쳤다. 그리고는 붉게 넘어가는 해를 뒤로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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