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부사관에 잇단 '성폭력'…軍은 고리 끊을 수 없을까

피해자는 '초급간부'…인사평정권 쥔 상관의 '압력' 못 이겨

미국·캐나다는 軍 명령체계서 분리된 정보 수집·지원체계 운영

 

고(故) 이예람 중사 사건을 비롯해 작년부터 공군에서 여성 부사관이 성폭력 피해를 입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잇달아 발생하지만 군은 여전히 이를 척결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엔 이 중사의 마지막 근무지였던 공군 제20전투비행단에서 여성 하사를 상대로 한 엽기적인 성희롱·성추행 사건이 벌어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군 내 성폭력은 피해 장병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군내 성평등 의식 제고와 성인지 감수성 향상을 통해 애초에 성폭력을 예방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건이 발생하면 군 지휘계통과 분리돼 독립성이 확보된 성범죄 대응 전담기구 운영 등을 통해 2차 피해 없는 사건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해자는 여성 하사·중사 '초급간부'

공군에선 작년 5월 이예람 중사(제20전투비행단→제15특수임무비행단) 성추행 사망 사건, 같은달 여성 하사 성추행 사망 사건(8전투비행단)이 연달아 발생했다. 또, 이예람 중사의 당초 근무지였던 제20전투비행단에선 지난달 여성 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관련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심지어 이는 이 중사 사건에 대한 특검 수사 중 일어난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 중사의 마지막 근무지였던 제15특수임무비행단에선 올해 1~4월 20대 여성 하사가 한 남성 준위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희롱·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는 모두 중사 이하의 초급 여성 간부였다. 부사관의 경우 2∼3년 주기로 근무지를 옮기는 장교 또는 만기 전역하고 기지를 떠나는 병사들과 달리 한 기지에 장기간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기술직이 많은 공군에선 반 단위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안의 위계질서가 강한 편이다.

직업군인으로서 정년까지 군 복무를 하기 위한 장기복무에 붙거나 진급을 하기 위해선 인사평정권자인 상관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게 초급 간부들의 처지다. 이들이 성폭력 피해에 대응하려면 군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여군은 "인사관리 면에서 상급자는 초급 여군 부사관들의 장기복무 여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라고 토로했다. 

더구나 성폭력 피해를 입은 공군 여성 부사관들이 근무한 비행단의 경우 비교적 도심과 거리가 멀어 일과를 마친 후 대부분의 생활을 영내에서 하는 등 외부와 격리된 환경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부사관들 사이에서 상관과 부하 간 접촉 빈도가 높아지고, 이로 인해 초급 간부들의 업무 스트레스가 커질 수 있단 지적도 나온다.

이와 함께 성폭력 피해를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폐쇄적인 남성 중심의 군대문화에선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와 함께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가 이뤄지기 쉽다. 부대까지 옮겨간 고 이예람 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경에도 2차 피해가 있었다.

◇여성 혐오·차별 인식 여전…성평등 의식 제고·소통 창구

작년 6월엔 여군 숙소에 무단침입해 불법 촬영을 한 혐의를 받은 공군 제19전투비행단 소속의 한 남성 부사관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여군을 전우나 동료가 아닌 성적대상으로 치부하는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군 특성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다. 

주로 부사관들이 익명으로 이용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최근 글들을 보면 이런 분위기가 더 뚜렷하게 읽힌다. '여부사관들 남장교들한테 엄청 꼬리 친다(유혹한다)'는 글부터 여성 부사관을 '업소녀' 등에 빗댄 글까지 올라와 있다. 

'한 여성 부사관이 허세 때문에 SNS에 명품 자랑글을 많이 올린다'는 글과 '여자가 굳이 안 와도 되는 곳을 오죽하면 왔겠느냐'는 여성 혐오성 발언들도 있었다. '여군이 유독 상장을 많이 받는다', '우리 부대에 팔굽혀펴기를 75개나 하는 독한X이 있다' 등의 경쟁 심리가 깔린 글들도 눈에 띄었다. 

군내 여성 혐오·차별을 불식시키기 위해 장병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의식을 제고하고 성인지감수성을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군을 성적 대상이 아닌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 동료로 바라보는 문화를 자리잡게 해야 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발간한 '국감이슈'를 통해 신세대 장병을 위한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성폭력 예방교육을 내실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각 부대 상황과 및 계급에 맞는 맞춤형 교육, 소규모 토론 교육 도입을 주문했다. 

입법조사처는 "코로나19로 인해 군부대 외부강사 출입이 어려워 성폭력 예방교육이 대면 교육보다는 사이버 교육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이버 교육은 형식적·소극적 참여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향후 오프라인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부연했다. 

이와 함께 군 부대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성평등 소통 협의체'를 운영하거나 피해 신고 장려문화를 자리잡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휘관의 성폭력 예방 활동을 평가하고 간부 양성 교육에 성인지 과목을 편성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미국·캐나다는 軍 명령체계서 분리된 정보 수집·지원체계 운영

미국엔 'SAPRO', 캐나다엔 'SMRC', 호주엔 'SeMPRO'가 있다. 기존의 군 명령체계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정보 수집·피해자 지원체계다. 또한, 캐나다, 호주 등의 경우 군 성범죄 사건을 민간에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커서 군의 폐쇄성이나 가해자 온정주의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한다.

김영곤 한국국방연구원(KIDA) 선임연구원은 지난 5월 '군 내 성폭력 사건의 효과적 해결을 위한 제도 및 조직문화 개선방안 연구'에서 군 지휘계통과 분리돼 독립성이 확보된 성범죄 대응 전담기구를 운영하고 민간의 역할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김 연구원은 "각국의 성범죄 대응 전담기구는 제한적 신고체계를 운영함으로써 성범죄 피해자들이 익명으로 법률, 의료 등의 지원 서비스를 두텁게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서 "일정 부분 성범죄 암수율(暗數率·드러나지 않는 범죄의 비율)을 줄이는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봤다.

김 연구원은 "캐나다는 민간 성폭력 지원 조직에 재정지원을 함으로써 군 성폭력 피해자들이 군 내·외부 조직 모두에서 피해 지원 서비스를 중첩적으로 받을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고 부연했다.

또한 강력한 성폭력 근절 정책 추진, 사건처리 과정의 모니터링 등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도록 국방부와 각 군 본부에 성범죄 예방·대응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피해자를 중첩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업무체계를 정비해야 한다는 게 김 연구원의 주장이다.

계급이 낮은 여성 부사관은 성폭력을 당해도 어디 가서 터놓고 피해 사실을 시원하게 말 할 수 없어 군 안에서는 사실상 '을(乙) 중의 을'이다.

이에 군 안팎에선 여성 초급간부의 고충 상담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소속 부대를 거치지 않고 국방부에 바로 신고할 수 있는 비밀보장 신고 채널을 상시 가동하고, 피해 사실 신고를 저해하는 현재의 초급간부 인사관리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해병대사령관 출신 전진구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는 "1990년대말부터 많은 여군이 들어와 군이 현재 전체 정원 중 여군 비율을 8% 목표로 상향조정하고 있는데, 여군을 전우나 동료로 보는 인식이 너무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성 관련 사고는 부대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단 인식이 자리 잡도록 의식개혁이 꾸준히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또 "여군이 성관련 문제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는 부대 지휘관의 역량과 노력에 달려있다"라고 강조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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