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대화'와 '대화의 조건'의 충돌

북한이 최근 대화의 조건을 선명하게 한 것은 한미일 동맹이 요구하는 '조건 없는 대화'를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만나자'는 한미일의 외교 전략에 '풀 것은 풀어야 만날 수 있다'로 응수한 것이다.

북한의 조건은 '이중기준'과 '대북 적대'의 철회다. 이중기준 철회는 자신들의 국방력 강화 행보는 '위협'이 아니니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이는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 행보를 '도발'로 규정하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바꿔보겠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도는 지난 9월 김여정 당 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자세히 설명됐다. 그는 일련의 무기 개발 및 시험발사는 '국방과학발전 및 무기체계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것이며, 이는 남한의 '국방중기계획'과 같은 것이라는 설명을 내놨다.

다른 모든 나라들이 이행하고 있는 국방력 강화 정책을 자신들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한미의 '북한의 도발'이라는 규정 및 국제사회의 비난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지난달 29일 전격적인 시정연설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더욱 자세히 밝혔다. 

김 총비서의 연설에는 "우리는 남조선에 도발할 목적도 이유도 없으며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라거나 "남조선은 북조선의 도발을 억제해야 한다는 망상과 심한 위기의식, 피해의식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라는 언급이 담겼다.

그는 또 미국이 '신냉전' 구도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며 "우리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나 적대시 정책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북한 최고위급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북한의 당장의 행보가 예상되기도 한다. 북한은 일단 자신들의 신무기 개발 및 시험발사를 이어갈 것이며, 이에 대한 한미의 태도를 대화 재개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확장된 북한의 외교 전략은 결국 무기 개발을 제재하는 국제사회의 '적대'를 사라지도록 한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총체적으로 대북제재 자체를 흔들어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 4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북한과의 '물밑 접촉'을 시작할 때부터 '조건 없는 대화'를 북한에 대한 입장으로 밝히고 있다. 일단 만나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형적인 미국식 외교 전략이기도 하다.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신임 총리도 취임 일성 중 하나로 "조건 없이 김정은 총비서를 마주할 각오가 돼 있다"라는 언급을 내놓기도 했다. 

미일의 이 같은 입장은 일단 북한을 대화판으로 이끌어낸 뒤, 북한의 '비핵화'를 목표로 조건과 조건을 주고받는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핵 관련 협상에 있어 북한을 '믿을 수 없다'라는 전통적인 미일의 시각이 반영된 입장이기도 하다. 이들에게는 과거 6자회담의 틀에서 진행된 북핵 협상에 있어 수시로 합의를 어기며 결국 6자회담을 무용지물로 만든 북한에 대한 고질적 불신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외 행보 재개로 인해 대화 혹은 유화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오히려 현재 상황은 '조건 없는 대화'를 내세운 쪽과 '대화의 조건'을 내건 쪽이 존재하는, 협상의 시작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으로 읽힌다. '대화'를 완벽하게 거부하는 외교를 구사하는 나라는 사실 잘 없다. 북한이 대화를 말한다고 이를 곧 '유화'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북한은 나름의 당근을 제시했다. 이 당근은 '남북 통신연락선 재개'다. 원래 남북이 정상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통신선의 복구가 당근처럼 된 상황이 좀 애처롭지만, 어쨌든 청와대의 요구사항에 북한이 호응한 것이 꽤 오랜만의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

김정은 총비서의 시정연설에는 없었지만, 연설 전에 나온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에서는 남북 정상회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의 재설치까지 언급됐다. 이 역시 우리 정부가 바라는 안건이기도 하다.

두 인사의 언급이 전체 맥락은 같다는 점에서, 김 총비서 역시 연락사무소의 복구와 정상회담을 어느 정도 카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일단은 남북관계 사안에만 해당하는 여러 가지 당근을 제시하면서, 남한을 통해 미일의 스탠스도 틀어보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리고 정부는 북한이 내민 '대화의 조건'에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단 북한의 조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했고, 다만 이 역시 만나서 풀 문제라고 말하며 나름의 절충안을 찾는 것으로 이해된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시정연설이 '무조건 관철'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임을 연일 부각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 등을 돌리는 식의 북한의 '이상행동'은 한동안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시한이 길어 보이지도 않는다. 내년 1월에는 김 총비서의 신년사를 통해 또 한 번의 대대적 입장이 표출될 것이고, 이후에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 행보의 상징이었던 동계올림픽이 북한의 최대 지원군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열린다. 북한은 이 두 번의 '이벤트'를 대충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때 나올 메시지에 무엇이 담길지는 정부의 외교 역량에 따라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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