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Q&A]제주인과 '희노애락' 함께한 감귤…재배는 언제부터?

11세기 이전부터 진상, 제주인엔 '고통'…1970년대엔 '대학나무'로

 

시장개방·타 과일과 경쟁 속에서도 '국민과일' 명성은 여전히 유지

 

우리를 괴롭히던 폭염이 언제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찬바람이 불어오면 제주는 서서히 노랗게 물들어간다. '제주감귤'이 익어가는 것이다.

깊은 가을 노랗게 색을 갈아입은 제주의 모습을 보고 조선시대 향토사학자 매계(梅溪) 이한진(1823~1881)은 '귤림추색'(橘林秋色)이라며 제주에서 특히 뛰어난 열 곳인 '영주십경'(瀛洲十景)의 하나로 꼽핬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도 보유 보물 가운데 처음으로 국보 승격을 추진하기로 하고 문화재청에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43면으로 구성된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봉진하는 광경을 그린 '감귤봉진'. 2019.11.27/뉴스1 © News1 강승남 기자


◇제주 감귤재배 역사 '최소 1000년'

제주에서 감귤은 언제부터 재배됐을까. 전세계적으로 아열대 또는 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감귤의 원산지는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부로 알려졌다.

중국은 감귤 재배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으로,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300∼4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의 감귤 재배 역사는 1000년이 넘는다. 제주감귤에 대한 최초 기록은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문종 6년(1052년)에 '탐라국에서 해마다 바치는 귤의 정량을 100포로 개정 결정한다'고 돼 있어 그 이전부터 감귤을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서기 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태조 천수 8년(서기 925년) 겨울 11월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치다'를 시작으로 '방물을 바쳤다' '토물(土物)을 바쳤다'하는 기록이 계속되는데 정황상 감귤이 포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자 제주감귤은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주요 공물로 관리됐다.

1526년 5곳의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했고, 1530년에는 과원이 30곳에 달했다. 중앙에서 요구하는 감귤의 진상 액수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 때문이다.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시절에는 관에서 관리하는 과원이 42곳으로 늘어났다.

진상하는 감귤의 종류도 유자, 당유자, 감자, 산귤, 청귤, 담금귤, 석금귤, 동정귤 등 다양했다.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돼 올라올 때 임금은 성균관 유생의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감귤을 하사하며 특별한 과거시험인 '황감제'(黃柑製)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감귤나무는 주로 조정에 진상품을 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재배됐기 때문에 제주도민에 있어 '고통을 주는 나무'였다.

진상 물량의 증가와 지방관리 등의 횡포로 그 민폐가 막심했다. 감귤원을 맡은 농민들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게되자 일부러 나무에 더운 물을 끼얹어서 고사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진상제도는 고종 31년(1893년)에 폐지됐지만, 제주도민들은 소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귤재배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제주시 도련동 감귤나무류 중 산귤나무. 제주시 도련동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주에서 재배되어 온 제주 귤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높이 6~7m, 수령 100~200년(추정)의  4종류 6그루의 귤나무가 있다. 문화재청은 201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발췌)© 뉴스1


◇프랑스 신부, 지금의 '온주밀감' 도입

제주감귤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전환기를 맞는다. 경제적 소득을 목적으로 감귤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량감귤은 한말 정치가인 박영효에 의해 도입됐다고 전해진다. 그가 제주유배 당시 일본에서 개량감귤을 들여와 과원에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제주에 유배된 박영효는 1년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1910년 6년까지 제주에 머물며 감귤재배를 제주인들에게 권장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감귤 주산지인 서귀포지역에 온주밀감을 처음 도입한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신부 타케(Esmile J. Touguet). 그는 제주에 자생하는 왕벚꽃나무를 일본에 있는 친구에 보내주고 그 답례로 보내온 온주밀감(미장온주) 15그루를 받았다.

그는 이 감귤나무를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원 '면형의 집'에 심었는데 마지막 한 그루가 지난 2019년 4월 고사했다.

이 고사목은 특수 약품 처리 등을 통해 '홍로의 맥'이란 작품으로 영구보존됐으며, 그 자리는 60년된 후계목이 대신하고 있다.

◇사과 뛰어넘어 국내 제1과수로
일제강점기 도입된 개량감귤이 규모를 갖춘 농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 서귀포에 살고 있던 일본인 '미네'에 의해서였다. 그는 1913년 온주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해 식재하고 본격적인 농장으로 출발했다. 이 농장은 해방 이후 '제주농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1920년부터는 매년 7000~8000그루의 우량 품종을 일본에서 도입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생활상태조사'에 따르면 1928년 제주 감귤 생산량은 약5만관(1관=3.75㎏)이었다. 감귤이 주요 농산물은 아니지만 제주도민들의 생활수입원으로 서서히 주목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셈이다.

광복이 된 1945년 감귤재배면적은 16㏊, 생산량은 80여t에 불과했다. 당시만해도 감귤원 개원은 고도의 기술과 상당한 자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반 농가는 감귤나무를 심을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들어 제주감귤산업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재배면적만 보더라도 1963년 100㏊에 이르렀으며, 이후 1968년부터는 매년 1000㏊씩 증가해 1975년 1만㏊를 넘어서게 된다.

이는 정부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5년부터 외국산 감귤의 수입금지로 감귤재배의 수익성이 보장되면서 감귤재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관심이 증가했다.

1964년 2월 연두순시차 제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수익성이 높은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이듬해 정부는 '감귤주산지조성 5개년 계획'을 확정했다.

1960~1970년대 감귤은 몇 그루만 있어도 자녀 학자금을 댈 수 있다는 의미로 '대학나무'라 불리기도 했다.

정부주도로 모든 개발이 집행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감귤재배의 또 다른 전환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내 감귤재배면적은 1990년 2만㏊를 넘어서게 된다.

또 감귤 생산량도 1970년 5000톤으로 사과·배·복숭아·포도·단감 등 5대 과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지만 5년 후인 1975년 사과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제2과수가 됐다. 이후 사과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1997년부터 감귤은 우리나라 제1과수가 됐다.

제주도내 한 농장에서 재배중인 한라봉.© 뉴스1


◇겨울철 '최애'과일 명성은 그대로

최근 제주감귤은 농산물 시장 개방과 국내 경쟁과일 성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국민과일'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도 부단히 하고 있다.

한라봉·천혜향·레드향 등 다양한 만감류와 고품질 감귤생산은 기본이고, 감귤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도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주스나 농축액에 국한됐던 감귤을 이제는 술이나 와인으로 마시거나 과자나 젤리, 초콜릿 등의 형태로 먹기도 한다. 심지여 몸에 바르기도 하는 시대다.

예전처럼 '대학나무'로 불리지는 않지만 새콤달콤한 감귤을 먹는 것 만으로도 삶의 피로를 덜고 얼굴에 웃음꽃을 피울 수 있게 하는 마법을 가진 제주감귤.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로 남아있는 이유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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