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한국전쟁 당시 최고 비밀병기"

보훈처, 6월 한국전쟁 영웅으로 백두산함 선정

"낙동강 교두보 확보에 기여, 창군정신 깃들어"

 

"백두산함은 부산으로 침투하려 한 북한 무장선을 침몰시켰다. 이는 중요한 항구를 잃어버리는 것을 막고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미군 해군연구소의 한 역사가는 백두산함을 이같이 설명했다.

국가보훈처가 올해 6월 한국전쟁 영웅으로 '백두산함(PC-701)'을 꼽으면서 함정(艦艇)의 진가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16일 보훈처와 해군 등에 따르면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으로, 북한군 600여 명이 탑승한 수송선을 침몰시킨 대한해협해전 승리의 주역이다.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초대 정부가 8·15 광복 이후 국내에 해상전투 임무를 수행할 전투함이 한 척도 없자 이에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에서 들여온 중고 전투함이었다.

당시 전투함은 전 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기금 형태로 마련됐다.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군 장교 월급은 쌀 한 말값도 안 됐는데, 전투함 인수를 위해 월급의 10%를 공제해도 불만을 가진 군인은 없었다.

부인회에서도 수예품, 의류, 식품 같은 현물을 모으는 행사를 열었고, 고철을 수집해 고물상에 파는 등의 방식으로 4개월 만에 1만5000달러가 모였다. 이에 정부 보조금 4만5000달러를 더해 인수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돼 있는 마스트 사진.(해군 제공)© 뉴스1


1949년 12월 인수된 백두산함 명칭은 한반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백두산에서 함명을,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 '7'에서 701 선체 번호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배 길이는 52.9m, 무게가 450톤, 최고속도는 33여㎞다.

국민 성금으로 어렵게 들여온 만큼 해군에서는 최고의 인재들만을 선발했고, 발탁된 승조원들 역시 자부심이 대단했다. 당시 장병이었던 한 관계자는 "그때만 해도 3인치 포를 장착한 군함이 없어 비밀병기였다"며 "100m 밖에다 새끼줄을 치고 헌병을 배치해 접근을 막았을 정도로 백두산함을 애지중지했다"고 회고했다.

다른 관계자는 "서울 길거리에서 '해양경비대 모집' 광고를 보고 입대했다"며 "당시 외출 나가서 백두산함 탄다고 하면 주변에서 다들 부러워했다"고 전했다.

백두산함은 성금에 보답하는 의미로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50년 6월 부산부터 묵호, 목포, 인천항 순서로 순방했다. 입항하는 항구마다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환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함정을 보고 "믿음직하고 대견하군. 이제 왜놈들이 우리 영해를 침범하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백두산함은 진해항에 입항한 지 45일 만에 한국전쟁과 직면했다. 1950년 6월24일 새벽 백두산함이 동해안 묵호항으로 출동해 적 함선의 상륙을 저지, 격멸하라는 최초의 전투 임무를 하달받게 된 것이다.

백두산함에는 승조원 65명이 탑승, 미군으로부터 구매한 3인치 포탄 100발만을 싣고 출항했다. 동해로 향하던 중 부산 오륙도 인근에서 한 장병이 "괴선박이 발견됐다"고 외치면서 북한 무장선과의 해상전투가 시작됐다.

백두산함은 적 선박을 뒤쫓아가며 주포와 기관총으로 사격했고, 인민군 함정도 맹렬히 반격했다. 이 과정에서 적 포탄에 국군 전병익 이등병조와 김창학 삼등병조가 전사하기도 했다.

북한군과의 교전은 백두산함에서 쏜 여러 발의 포탄이 적 선교를 폭파, 인민군 600여명을 태운 북한함정을 침몰시키면서 종료됐다. 가랑비 내리는 날씨 속 약 1시간 동안의 교전이었다.  

당시 신호사 보직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박모 장병은 "서로 교전을 벌여 적의 배가 아군의 포에 맞아 기울었지만, 우리 배도 적이 쏘는 포탄을 맞고 피해가 있었다"며 "적선이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기뻤다"고 증언했다.

부산 중구 중앙공원에 마련된 백두산함 승조원 흉상과 기념비.2021.6.17/© 뉴스1 백창훈 기자


백두산함은 인천상륙작전에도 투입됐다. 맡은 임무는 인천항에 이르는 동·서 수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백두산함은 소청도와 대청도 해역에 접근해 인민군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남한 국적의 주민을 만나 첩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첩보를 들은 덕에 백두산함은 승조원 20명을 선발해 특공대를 편성하고 대청도 인민위원장을 사로잡으니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달려왔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도 백두산함은 해군에서 사용하다 1959년 노후화 등으로 인해 퇴역했다. 현재 해군사관학교 내 돛대만이 보존돼 있으며, 국가등록문화재 463호로 등록돼 있다.

대한해협전투에서 전사한 전병익, 김창학 두 장병을 기리기 위해 부산 중구 중앙공원에도 흉상과 기념비가 전시돼 있다.

해군작전사령부 오세성 대령은 "백두산함은 대한해협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낙동강 교두보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며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스스로 바다를 지키고자 했던 해군 선배들의 창군정신을 본받고자 한다"고 말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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