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주인공이다. 30년 전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이 당대를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 감동의 순간을 복기했다.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용산 CGV에서 언론배급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영화 '1987'(장준환 감독)은 빈틈없는 연출로 '박종철 고문사건'과 '6월항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정공법으로 다룬 작품이다.
'1987'과 비교선상에 가장 먼저 놓일 수 있는 영화는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천만 영화로 기록될 '택시운전사'다. '택시운전사'는 1980년 5.18 민주화 항쟁이라는 소재를 평범한 소시민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시각으로 그려내며 웃음과 감동을 줬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6월 항쟁'에 대한 '1987'의 접근법은 '택시운전사'와 사뭇 다르다. 특정 인물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보는 데 집중하기 보다 사건에 '개입'된 여러 인물들의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이는 결과적으로 '6월 항쟁'이라는 결말의 의미와 무게감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사람'보다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 셈. 영화는 시간 순으로 흘러가지만 구조적으로는 '6월 항쟁'이라는 중심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있었던 다양한 순간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원형을 이룬 듯하다.
언론시사회에서 감독이 소개한 것처럼 '1987'은 박종철 고문사건으로 시작해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구조다. 어느 겨울, 국가 기관의 조사를 받던 스물두살 대학생이 갑자기 죽음을 당한다. 조사를 담당했던 대공수사처 형사들은 '관례대로' 처리한다며 대학생이 죽은지 채 몇시간도 안돼 가족 동의도 없이 서울지검 공안부장에게 화장동의서를 들이민다.
하지만 대공수사처의 반복되는 부정에 신물을 느낀 공안부장 최검사(하정우 분)는 "이번에는 법대로 하자"며 이를 거부한 채 부검을 고집하고, 곧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
'1987'의 재밌는 면은 특정한 누군가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옷을 벗으면서까지 부검을 고집한 최검사(하정우 분)와 같은 공직자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취재에 열을 올렸던 윤기자(이희준 분)와 같은 언론인들, 감옥에서 은신처까지 민주주의 운동가들의 연락책을 맡은 한병용(유해진 분)과 같은 조력자들과 몸을 바쳐 투쟁한 대학생들까지, '1987'은 이 모든 이들의 결정적 순간들을 하나 하나 이어 만든 영화다.
'악의 축'은 존재한다. 김윤석이 연기한 대공수사처장인 박처장이다. 평안남도 지주집안 출신인 박처장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인물.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그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휘하 형사들을 다스린다.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고 찌르는 박처장의 살기어린 명령에 형사들은 "받들겠다"며 절대 복종한다. 하지만 이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듯한 박처장은 스스로를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개'라고 칭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는 그의 권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았던 파렴치한 독재자로부터 비롯됐다.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군상들의 작지만 가치있는 양심들이 이어져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던 완고한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했던 당시 시민들의 열망이 쏟아져 결국 '6월 항쟁'이라는 바다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그렸다. 진지하고 무게감 있게 그린 탓에 웃음이 많지 않고, 그래서 '상업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그려낸 진지하고 올곧은 시선 만으로도 묵직한 감동을 준다. 오는 2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