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숙
수필가(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진원지를
모를 그리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2번 C단조 2악장을 듣는다.
귓속말처럼 다정한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에 화답하듯
화사하게 울려 퍼지는 목관 악기와 현악기의 기막힌 배열로 음색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는 이 곡을 듣고 있으려니까 얼마 전
고흐의 그림 전람회에 가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스케치 한 폭이 떠오른다.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기찻길이 나 있었고, 그리고 기찻길 넘어 바다로 가는 길 끝에 움직임을
멈춘 풍차가 정물처럼 하늘을 등에 업고 서 있었다.
섬세한 터치가 선마다 묻어나는 그 그림은. 기차 여행을 하는 도중 그 고장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고흐가 그곳에 내려 하룻밤을 머물면서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숨이 막혔다. 하얀 도화지의
그 무한한 색 때문인가? 진원지도 모를 그리움이 밀려와 내 가슴이 설레다 못해 아득해졌다.
그가
스케치할 동안…….
그의
손이 섬세하게 움직일 때,
고독의
깊은 그늘이 드리운 그의 영혼은
막연한
그리움과 설렘 때문에 앓고 있었으리라…….
동생인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사랑에 대한 세가지 단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하는 상태, 둘째는 사랑하고 있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상태, 셋째는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받는 상태, 고흐는 그해 여름 케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외로운 사랑. 짝사랑이었다. 위의 것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절망과 맞서야 하는
그런 사랑이었지만,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고통과 슬픔 여러 가지 작은 고충까지도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는 그리움에 가슴을 절이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서 삶이 고독한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데,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의사 슈타인은 사랑으로 해서 얼마나 사람이 더 고독해질 수 있는지를 보게 한다.
한 여인을 향한 절절한 그의 사랑은 고독과 고뇌로 점철된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길이었다. 슈타인의 사랑은 은은하며, 잔잔해서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사랑이었으며, 십대의 철없던 나는 그의 가슴앓이에 함께 아파하고 울었다. 지금은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기엔 나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는데도 슈타인 박사와 고흐가 했던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 못하고 만다.
그림
앞에 선 내 가슴에서 쿵쿵 북소리가 났다. 그의 그리움을 향한 열병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염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던 때가,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눈이 멀고 가슴이 타들어 재가 될 만큼 혼자 뜨겁게 사랑했던
그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따뜻한 시절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생을 사는 동안 진원지를 모를 그리움에 목말라하거나 고흐처럼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며 산다.
그 한 길의 사랑이 결국 우리에게 환희보다는 슬픔과 고통, 절망을
가져다 주지만. 그리움이나 설렘 같은 인생의 보석들은 만나려고, 위험한
사랑일지라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한다. 사랑을 하는 한 우리는 늘 꿈을 꿀 수 있다.
잃어버린 꿈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라고, 그것이 짝사랑일지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