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덕 목사(벨뷰한인장로교회 담임)
생명의 선물
마태복음 1:18-25
시름은 한숨 바람에 잊어버리고, 보고 싶던 큰 아들과 한 이불에 누운 엄마는 마냥 행복합니다.
서울
구경이 처음이냐는 큰 아들의 질문에 엄마의 답변이 이렇습니다(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너는 내가 낳은 첫 애 아니냐. 니가 나한테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인디. 배가 그리 부른 것도 처음이었구 젖도 처음 물려봤구… 넘들은 첫애
낳구선 다들 놀랍구 기뻤다던디 난 슬펐던 것 같어… 이제 어째야 하나…
왈칵 두렵기도 해서 첨엔 고물고물한 네 손가락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잠시 멈췄습니다. 여자로서는 일생의 가장 큰 충격, 임신과 출산을 겪는 아내를 나는
얼만큼 이해했었나… 나는 참 무심했습니다. 어찌 그렇게 몰랐을까요.
스물다섯 나이까지 살았던 보금자리를
떠나 목회자 남편과 이룬 둥지는 그리 튼튼해 보이지도 안정감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남편인 저는 생활에
바빴고 아직도 어색하기만한 남편의 품에서 아내는 석 달 만에 첫 아기를 가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사나’ 절망에 가까웠을 그 두려움을, 철부지 남편은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이제 어김없이 찾아올 여자 인생 최강의 도전, 온 몸이 뒤집어지고
모든 뼈마디가 움직인다는 고통을, 혼자서 마주한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아내는 어땠을까…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 쪽이 서늘합니다.
출산을 경험하면서 엄마는 기쁨, 감사, 경이로움 등의 모성을 자각합니다. 생명이 주는 원초적인 기쁨의 정서이며, 가히 모든 불안과 고통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강력합니다.
해산은 극한의 고통이지만 생명의
신비를 선물합니다. 생명의 태동과 융합의 과정을 지나면서 엄마는 생명과 존재의 근원에 가까이 접근합니다. 엄마는 아기를 안고 혼자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잊고 아기와 함께
있으면 그저 행복합니다. 원초적인 기쁨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다가
진리를 맛보고, 모든 것을 상실하면서 자유를 얻고, 버리면서
얻는 기쁨이 이렇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인생 중반 불혹의 나이가
되면 생명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접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 어느 순간에 생명의 존엄을 마주하게
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영적 신비를 경험하거나 진리를 깨닫거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 기회가 기적처럼 찾아옵니다.
생명현상처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생명은 경험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영적인 것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공지능이 인간한계를 뛰어 넘는다 해도, 심지어 인간의 생명을 물리적으로 영원히 연장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영생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생명은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육체적 생명이든, 영적 생명이든,
그 본질은 기원처럼 불가사의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정의할 수도, 어디서 왔는지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존 스토트).
생명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과 고행을 대가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남으로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창 2:7). 흙으로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생명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생명을 알 수 없고(엡4:18), 영생은 오직 예수 안에 있습니다(요일5:11).
예수님의 탄생은 신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찾아오신 일이므로 사람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이 선물이듯, 생명을 깨닫고 아는 일도 선물이며, 생명을 앎으로 영생을 얻는 일도 선물입니다(요17:3).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없이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도 하나님께 가는 길도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생명의 선물을 받고 아이처럼 기뻐하십시오. 행복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생명의 기쁨은 매우 근원적인 것이며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